서른, 논어를 읽어야 하는 이유

2012. 11. 2. 09:35다독다독, 다시보기/지식창고



<마흔, 논어를 읽어야 할 시간>이라는 베스트셀러가 있습니다. 아직 불혹은 아니지만 많은 공감을 느끼며 꽤나 흥미롭게 읽어 내려갔던 책이지요. 흔히들 마흔 즈음을 ‘인생의 굽이를 도는 시간’이라 정의 내립니다. 마흔을 기점으로 행복지수가 급격히 떨어지는 것을 보더라도 무언가를 결정하고 삶의 변화를 맞이해야 하는 마흔은 참으로 고된 나이같습니다. 




논어 속 삶의 지혜 흡수하기


그렇다면 서른은 어떨까요? 마흔과 달리 서른이란 출발선상에서 새로운 시작을 맞이하는 나이이지요. 결혼과 육아, 직장 커리어나 기타 개인적인 삶의 조각들이 이 시기에 시작되거나 공고해집니다. 20대가 기나긴 삶을 위한 워밍업 단계였다면 서른은 ‘진짜’ 어른의 시간을 맞이하게 되는 시작인 셈입니다. 어찌 보면 가장 치열하고 진지한 고민과 공부가 병행되어야 하는 시간이지요. 그런데 이 공부는 지금껏 학교나 학원에서 배우던 그런 공부가 아닙니다. 지식을 위한 공부가 아닌 지혜를 위한 공부이기 때문입니다. 인격과 처세와 성공과 인간관계와 경쟁과 정의와 실천에 대한 배움. 모름지기 <논어>란 거친 삶을 이끌 명쾌한 이정표입니다. 른, 지금이 바로 <논어>를 읽어야 할 시간입니다.


    

[출처-서울신문]





2천 500년을 이어온 최고의 자기계발서 


순간을 모면할 처세만을 일러주는 자기계발서는 시중에 흔합니다. 삶의 어느 시기에 적용해도 다른 맛과 다른 향을 느끼게 해주는 자기계발서는 드물지요. 하루에도 수 백 종의 신간이 쏟아지는 출판시장에서 수년 간 자리를 지키며 사랑받는 다는 것은 그 안에 분명 ‘무언가’가 들어 있다는 이야기겠지요. 그런데 이천 오백년이란 세월동안 자국뿐 아니라 전 세계인들에게 사랑받고 전해져 내려왔다면 어떨까요? 그것은 ‘무언가’ 있다는 단순한 짐작을 넘어 인류 역사와 문화의 일부를 바꾸었다고 평가할 만합니다. 이천 년이라는 세월동안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전쟁의 장군과 나라의 관리와 여염집 아낙과 평범한 학생까지- 그 안에서 변화되고 깨달음을 얻었을까요? <논어>를 ‘인류 지혜의 보고(寶庫)’라 부르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는 것입니다.


<논어>에는 우리가 인간답게 살기위한 가치들이 그득히 담겨 있습니다. 그 가치란 시대나 환경이 변함에 따라 달라지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라는 공통분모 안에서 누구나 익히고 다듬어야 할 보편적인 진리들입니다. 말하자면 그냥 사는 것이 아니라 ‘사람답게 사는 길’을 모색하는 과정에서 손에 들어야 할 책이라는 이야기지요.


그런데 사실 고전을 읽기란 그다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것도 ‘공자 왈 맹자 왈’ 시대의 책을 집어 들기란 용기마저 필요한 일이지요. <논어>를 삶 속에 불러들이기 위해서는 먼저 이러한 고정관념을 타파하는 작업이 필요합니다. 사실 <논어>는 철학적 사상만을 담고 있다기보다 상당한 문학적 묘미를 느끼게 해주는 책이거든요. 공자와 등장인물인 제자들, 그리고 동시대 다른 인물들까지 하나같이 저마다의 개성과 이야깃거리를 지녔지요. 성균관대학교 동양학부 신정근 교수님의 말씀처럼 <논어>에 나오는 안연과 자로, 관중과 삼가 등도 단지 한눈팔지 않고 진리를 좇는 구도자여서 개성이라곤 조금도 엿볼 수 없는 차가우며 이지적인 사상가들이 결코 아닙니다. 오히려 그들은 <논어>의 세계에서 서로 좌충우돌하며, 성내며 웃고 떠드는 살아 있는 인간들이지요. 이런 점에서 신정근 교수는 <논어>를 ‘플롯 없는 소설’ 또는 ‘운율 없는 시’라고 말합니다. <논어>의 매력에 진정으로 빠진 사람들이 하나같이 ‘논어는 무엇보다도 재미있는 책’이라고 말하는 것도 다 같은 맥락인가 봅니다. 그러니 <논어>와 함께 남은 생을 보내기로 결심했다면 먼저 그 안의 숨은 재미를 찾기 바랍니다.



[출처:한국민족문화대백과 '논어']




아시다시피 <논어>는 공자 사상의 정수를 담은 책으로 그의 사후에 제자들이 엮은 것입니다. 신정근 교수는 한 인터뷰에서 ‘<논어>가 씹을수록 깊은 맛이 우러나오는 이유’에 대해 ‘거듭된 실패 뒤에 쓰인 책이기 때문’이라 대답했습니다. 중국을 넘어 동양철학 전반에 영향을 끼친 공자의 삶은 사실 실패로 가득했다고 합니다. 사실 그는 태생부터 순탄치 않았습니다. 공자의 아버지는 70세가 넘어 외도를 하여 공자를 낳았고 그의 어머니는 무당집 딸로 태어났으며 공자는 어릴 때 부모를 모두 잃고 고아로 세상천지에 남겨졌음을 아는 이는 많지 않습니다. 그는 첫 걸음부터 어떠한 기반 없이 스스로의 힘과 정신으로 자신을 다잡으며 살아가야 했던 것입니다.


당대의 공자는 시대를 아우르는 화려하고 성공한 정치인, 사상가가 아니라 실패와 좌절 속에 머무를 곳도 없이 떠돌던 유랑자였습니다. 가슴 속에 품은 거대한 이상은 현실 세계에서 주인을 찾지 못하였고 그런 그는 모르긴 몰라도 많이 고독하고 아팠을 것입니다. 만약 공자의 삶이 천하를 떠돌며 유랑하는 고독한 사상가가 아닌 성공을 거듭하며 권력의 꼭대기에 오른 정치인의 삶이었다면 어땠을까요? 지금의 <논어>와 많은 차이를 보이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영원한 배움을 위한 책


논어의 첫 구절은 학(學)자로 시작합니다. 



子曰, "學而時習之, 不亦說乎? 有朋自遠方來, 不亦樂乎? 人不知而不?, 不亦君子乎?

자왈, "학이시습지, 불역열호? 유붕자원방래, 불역락호, 인부지이불온, 불역군자호?

(배우고 익히면 또한 기쁘지 아니한가? 벗이 먼 곳에서 찾아오면 또한 즐겁지 아니한가? 남이 나를 알아주지 않아도 노여워하지 않으면 이는 군자가 아니겠는가?)



이 문장은 곧 공자의 삶을 축약해 보여준다는 평을 받습니다. 그는 평생을 도덕적 수양과 학문을 전파했으며, 천하를 떠돌며 뜻을 펼치려 했으나 끝내 좌절하고 말았지요. 그가 학, 즉 배움을 처음으로 내세웠다는 것은 의미하는 바가 큽니다. ‘배움을 위한 배움’이 사라져간 시대에, 과시나 출세를 위해 이름 알리기에만 급급한 ‘진정한 군자나 리더’가 소멸해가는 시대에 2,500년도 전 공자의 외침은 많은 것을 깨닫게 해줍니다.  


서른, 공자가 던지는 진정한 메시지를 받아들이고 지녀야 할 나이입니다. 스무 살의 <논어>와 서른의 <논어>는 그 의미가 전혀 상이하게 찾아올 것입니다. 마음을 확고히 세워 도덕 위에서 움직이지 않는다는 이립(而立)의 서른. 다시 <논어>를 읽어야 할 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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