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네21기자의 2012 BIFF 후회하지 않을 5편

2012. 10. 9. 09:59다독다독, 다시보기/이슈연재



고민이다. 도대체 무엇을 볼 것인가. 씨네 21 기자인 나 역시 고민이다. 도대체 무엇을 추천할 것인가. 열심히 영화를 챙겨본다고 봤지만 올해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소개되는 300여편의 영화를 모두 본 것도 아니다. 그러니 조심스럽다. 하지만 조심스럽게, 후회하지 않을 선택이 될 5편의 영화를 골랐다. 부산국제영화제 티켓 카탈로그를 아무리 뒤져봐도 뭘 봐야할지 모르겠다 하는 이들이 참고하면 좋을 것 같다. 




▲2012 부산국제영화제 풍경




가족의 나라 Our Homeland


<가족의 나라>는 나의 올해 첫 부산국제영화제 관람작이다. 영화제가 시작되기 전 기자들은 스크리닝룸에서 미리 영화제 상영작을 볼 수 있는 기회를 갖는다. 스크리닝룸을 찾은 첫날, 제일 먼저 <가족의 나라>에 손을 뻗었다. 누군가 지나가는 소리로 ‘스크리닝룸에서 보게 되는 첫영화가 그해 영화제에서 만나는 가장 재밌는 영화가 되더라’는 말을 했다. 이상하지만, 그 근거 없는 얘기는 내게도 통했다. 


“현실에서는 넘을 수 없는 경계를 상상 속에서 넘어가보고 싶다.” 재일동포인 양영희 감독은 자신의 가족사를 두 편의 다큐멘터리 <디어 평양>과 <굿바이 평양>에 풀어놓았다. 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 간부인 아버지와 재일조선인 귀국사업으로 북한에 건너간 오빠들의 이야기는 다시 극영화로 재탄생한다. 양영희 감독의 첫번째 극영화 <가족의 나라>는 북한으로 이주한 뒤 25년만에 일본으로 돌아온 성호와 성호의 여동생 리에를 이야기의 중심에 놓는다. 뇌종양 치료를 목적으로 한 방문이라 성호의 일본 체류 기간은 3개월로 제한되어 있다. 재회의 기쁨은 이루 말할 수 없이 크지만 25년이란 세월은 어쩔 수 없이 성호와 리에 사이에 보이지 않는 벽을 세운다. 게다가 북한의 감시원은 일거수 일투족 성호의 일상을 감시한다. 



▲영화 <가족의 나라> [출처-다음 영화]




양영희 감독은 “여동생은 나 자신이 모델이며, 오빠는 나의 오빠들을 합친 듯한 캐릭터”라고 영화 속 인물들을 소개한 적 있다. 그런 점에서 양영희 감독은 캐스팅에 공을 많이 들였을 것이다. 배우들의 연기는 하나같이 훌륭하다. <원더풀 라이프> <공기인형>의 배우 아라타는 성호의 복잡한 내면을 보일 듯 말듯 표현해내는데, 그 연기가 일품이다. 리에 역을 맡은 안도 사쿠라는 이 조용한 드라마 안에서도 특유의 자유로운 감성을 뽐내고야 만다. 북한 감시원 역을 맡은 <똥파리>의 양익준 감독도 묵직하게 제 존재감을 발휘한다. 양영희 감독과 세 배우들이 올해 부산국제영화제를 찾았다. 기자회견장이고 시사회장이고, <가족의 나라> 팀이 가는 곳마다 눈물바다가 돼버리는 이상한 상황이 연출됐다. 감독이 울자 배우도 울고 관객도 따라 울었다. 여러모로 다큐멘터리스트가 아닌 영화감독 양영희를 발견하게 해준 작품 <가족의 나라>는 올해 부산국제영화제 필견 작품이다. 




바람의 검심 


사람들이 계속 물었다. “<바람의 검심> 진짜 재밌어요?” 이 질문에는 일본의 국민 만화 중 하나로 손꼽히는 와츠키 노부히로의 <바람의 검심>이 혹시나 영화로 만들어지는 과정에서 훼손당하지는 않았을까, 하는 우려가 담겨 있다. 그 질문을 받을 때마다 나는 이렇게 답했다. “재밌어요. 사토 타케루도 멋있고 액션도 끝내줘요.” 



▲영화 <바람의 검심> 포스터와 부산국제영화제 바람의 검심 무대인사(오른쪽 위)




연재 종료 뒤 13년 만에 <바람의 검심>이 실사 영화로 만들어졌다. 영화는 일본 동란의 막부 말기, 수많은 사람들을 공포에 떨게 만든 ‘칼잡이 발도재’가 과거 암살자로서의 삶을 지우고 불살의 맹세를 한 ‘켄신’으로 살아가는 과정을 따라간다. 오토모 게이시 감독과 배우 사토 타케루가 이 부담스런 프로젝트에 승선했다. 오토모 게이시는 드라마 <하게타카> <하쿠쇼 지로> 등을 연출한 유명 드라마 감독이고, 사토 타케루는 드라마 <블러디 먼데이> <메이의 집사>, 영화 <벡> 등에 출연하며 청춘스타로 떠오른 배우다. 두 사람은 드라마 <료마전>에서 함께 작업을 한 적이 있는데, 드라마를 찍으며 사토 타케루의 “연기력, 운동신경, 배우로서의 자세” 등을 지켜본 오토모 게이시 감독은 “그가 없었다면 <바람의 검심>을 만들 수 없었을 것”이라고 단언했다. “원작자, 제작자, 감독인 나까지도 켄신 역에 사토 타케루만한 적임자가 없다는 것에 의견이 일치했다.” (여담이지만, 영화제에서 직접 사토 타케루를 만났다. 어린 배우의 눈빛에서 옴므파탈의 향기를 맡을 수 있었다.)



 

▲2012 부산국제영화제 영화 <바람의 검심> 무대인사 동영상 




감독과 배우 모두가 중요하게 생각한 것은 역시나 액션이다. 오토모 게이시 감독은 “액션신에서 CG를 쓰지 않겠다는 방침을 세웠고, 대역 없이 배우들이 직접 연기하는 걸 원칙으로 삼았다”. 사토 타케루는 그 믿음에 보답이라도 하듯 절도 있고 속도감 있는 액션을 선보인다. 앞길이 창창한 이 젊은 배우는 <바람의 검심>이 자신의 “대표작”이 될 거라 말했다. 현재 일본 박스오피스에서 선전하고 있는 <바람의 검심>은 오토모 게이시 감독의 필모그래피에서도 의미있는 작품으로 남을 것 같다. 




세븐 썸딩 Seven Something


2PM의 닉쿤이 태국에서 영화 한편을 찍었다는 소식은 알고 있었다. 그게 <세븐 썸딩>인 줄은 몰랐다. 기대치 못한 반가운 얼굴을 보게 되었을 때의 기쁨. 이 영화는 그 기쁨의 여운을 오래도록 간직하게 해준 영화다. 



▲영화 <세븐 썸딩> [출처-다음 영화]




<세븐 썸딩>은 세 편의 영화 <14> <21/28> <42.195>를 하나로 묶은 옴니버스 영화다. 태국 영화사 GTH의 창립 7주년을 기념해 만들어졌다. 영화는 인간의 삶이 7년마다 큰 변화를 겪게 된다는 전제를 깔고 이야기를 풀어간다. 이야기와 형식의 조화가 돋보이는 <14>는 14살 소년, 소녀 커플을 주인공으로 내세운다. 페이스북과 유튜브에 수시로 여자친구의 영상을 올려 그 반응을 살피는 디지털 키드가 결국 페이스북과 유튜브 때문에 여자친구와의 관계를 망쳐버린다는 내용이다. 재기 넘치는 영상기법이 영화 내내 발랄하게 펼쳐진다. 한때는 연인 사이였지만 지금은 남이 된 영화배우 커플의 이야기 <21/28>, 개인적인 상처를 간직한 42살 여자와 그녀에게 마라톤을 통해 상처를 극복하는 법을 가르쳐주는 젊은 남자의 이야기 <42.195>도 각각의 개성을 지닌 에피소드들이다. <21/28>은 과거와 현재, 로맨스와 코미디를 자유자재로 오가며 이야기의 진부함을 털어내고 <42.195>는 앞선 두 작품보다 더 오래 감동과 여운을 전한다. <세븐 썸딩>은 구색을 잘 갖춘 옴니버스 영화다. 세 편 모두 개성이 뚜렷하고, 세 편 모두 일정 수준 이상의 재미를 안겨준다. 태국 영화의 현재를 느낄 수 있는 작품이다. 

 



가시꽃 


<가시꽃>은 고교시절 친구들 틈에 끼여 윤간에 가담한 청년이 십년 뒤 자신의 죗값을 치르는 이야기다. 20대의 성공은 공장에서 성실하게 일하는 청년이다. 성공은 교회에서 장미를 만나는데, 알고보니 그녀는 십년 전 자신이 저지른 사건의 피해자다. 장미의 뒤를 쫓는 성공은 그녀에게 죄를 고백하고 용서를 구하려 하지만, 함께 떠난 교회 엠티 고백의 시간에 과거 자신을 해한 남자들을 모조리 죽여버리고 싶다는 장미의 말에 크게 충격을 받는다. 


이돈구 감독의 문제적 데뷔작 <가시꽃>은 제작비 3백만원으로 만든 초저예산 영화다. 이돈구 감독은 자신의 사비 1백만원에 친구의 친구에게서 빌린 2백만원을 보태 이 영화를 완성했다. 제대로 된 장비조차 갖추지 못하고 찍었지만, 이 영화에 담긴 에너지는 엄청나다. 특히 초반, 이야기를 끌고가는 힘이 좋다. 감독은 “성범죄는 결코 용서받을 수 없다, 이 단 한줄만 생각하며 찍은 영화다. 용서받을 수 없는 상황에 처한 인물이 어떻게 죗값을 치를 것인가, 고민을 많이 했다”고 말했다. 닫힌 결말에 대해 쓴소리를 할 수도 있겠지만, 그보다는 이 영화가 가진 날 것의 힘에 더 주목하게 된다. 



▲영화 <가시꽃> [출처-다음 영화]




<가시꽃>에서 돋보이는 것 또 하나는 신인 배우들의 신들린 듯한 연기다. 이돈구 감독은 대학에서 연기를 전공했고, 대학로에서 연극배우로도 활동한 경력이 있는 배우 출신 감독이다. “류승완 감독처럼 연기와 연출을 모두 잘 하는 연극인이 되고 싶다”는 그는 <가시꽃>에서 놀라운 연기 연출 실력을 선보인다. 경쟁 부문인 뉴커런츠 섹션에서 상영되는 <가시꽃>의 수상 결과도 기대 된다. 





여자의 호수 Woman's Lake


편견을 지우고 보자. <여자의 호수>는 레즈비언 커플의 이야기이긴 하지만 세상 모든 커플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로사는 호수에서 어망으로 물고기를 잡으며 살아간다. 그녀의 연인 키어스틴은 호숫가에 근사한 집을 한채 갖고 있다. 어느날, 젊은 레즈비언 커플 에비와 올리비아가 이곳으로 캠핑을 와 이들 중년의 레즈비언 커플 사이에 불쑥 끼어든다. 두쌍의 레즈비언 커플의 미묘한 심리전은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잔잔한 호수에 제일 먼저 파문을 일으키는 장본인은 에비다. 자신의 감정을 표현하는 데 주저함이 없는 에비는 로사에게 다짜고짜 키스를 퍼붓는다. 키어스틴의 사랑에 의심을 품고 있던 로사는 이런 상황이 당황스럽지만 그렇다고 적극적으로 에비를 밀쳐내진 않는다. 올리비아는 자신의 사랑을 로사에게 빼앗긴 것 같아 속상하고, 키어스틴은 로사에게 질투심을 느낀다.



▲영화 <여자의 호수> [출처-다음 영화]




<여자의 호수>는 네 여인의 흔들리는 감정을 세밀하게 묘사하는 데 주력한다. 그 과정에서 동원되는 건 여인들의 어지러운 시선 교환이다. 카메라는 식탁에 둘러앉아 웃고 떠들고 밥 먹고 키스하고 춤추고 사랑하는 이들의 불똥 튀는 시선 교환을 매력적으로 담아낸다. 이상용 부산국제영화제 월드프로그래머는 “세대교체가 완전히 이루어진 독일 영화에 주목하라”고 얘기했는데 <여자의 호수> 역시 그런 독일 영화 중 한편이다. 



©다독다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