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 10. 19. 09:13ㆍ다독다독, 다시보기/이슈연재
산도르 마라이(Sandor marai)라니. 참으로 낯선 이름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 생소한 이름의 이국작가는 그의 작품만큼이나 격정적이고 열정적으로, 그러나 또한 비밀스럽고 고요히 생을 살다간 헝가리의 대표 작가입니다. 몇 해 전 우연한 기회에 산도르 마라이를 알고 난 후 저는 틈나는 대로 그를 소개하고 다녔습니다. 문장 하나하나 뜨거운 삶에서 얻은 통찰을 응축해 놓은 탓에 한 편의 기나긴 시처럼 읽히는 그의 소설들을 더 많은 분들께 더 널리 읽히고픈 욕심에서지요. 특히나 적당히 쌀쌀한 날씨와 쓸쓸한 기운이 감도는 요즘 같은 날들은 산도르 마라이를 읽기에 더없이 좋은 밤입니다.
거장의 생애
왜 유독 천재적인 예술가들은 뒤늦게, 혹은 사후에 진면목을 평가받고 재주목 받게 되는 것일까요? 참으로 잔인한 아이러니입니다. 산도르 마라이 역시 다르지 않습니다. 그의 작품들은 90년대 후반에야 유럽 등지에서 출간되어 뜨거운 반응을 얻게 됩니다. 당시 유럽 각국의 언론들은 ‘위대한 유럽 작가의 재발견’, ‘우리는 벌써 오래 전부터 그를 알았어야 했다.’, ‘우리는 앞으로 토마스 만, 프란츠 카프카, 로베르트 무질 등과 나란히 그를 거론하게 될 것이다.’ 등의 찬사를 쏟아내며 숨겨져 있던 보석을 발견한 것에 대한 흥분을 감추지 않았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그의 생의 궤적은 이미 오래 전에 자취를 감추었기 때문입니다. 아니, 좀 더 엄밀히 말하면 스스로를 세상과 격리시켰기 때문입니다.
산도르 마라이는 1900년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소도시 카샤우에서 태어났습니다. 당시의 동유럽은 급진적인 변화들로 많은 것이 붕괴하는 격동의 현장이었고 그의 조국 헝가리는 그 중심에 놓여있었습니다. 이후 그는 독일과 프랑스 등지를 떠돌며 신문에 글을 기고하고 생계를 유지했습니다. 그러나 모국어인 헝가리어로 작품을 쓰기 위해 다시 조국을 찾은 뒤 1948년, 다시 망명길에 올라 이후 영원히 조국땅을 밟지 못하는 비극적인 운명을 안게 됩니다. 당시 조국의 독재정권으로부터는 부르주아 작가, 계급의 적이자 배반자라는 오명을 얻고 작품 전체가 금서가 되기도 합니다. 이후 산도르 마라이는 41년이라는 긴 세월동안 이탈리아, 스위스, 미국 등 세계 각지를 떠돌며 쓸쓸한 망명생활을 하다가 1989년, 그토록 간절히 밟기를 희망하던 헝가리 땅을 끝끝내 보지 못한 채 미국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습니다.
산도르 마라이는 독일어와 영어 등 여러 외국어에 능통했으나 언제나 모국어인 헝가리어로만 작품을 썼다고 합니다. 지구상에서 겨우 천만 명 남짓만이 이해할 수 있는 언어로 말이지요. 정작 조국은 자신의 많은 것을 빼앗았지만 ‘어디에 놓이든 간에 헝가리 작가’라는 팽배한 자의식을 놓지 않았습니다.
산도르 마라이는 이처럼 고독하고 고요한 삶을 살았으나 그 고독 속에서 얻게 된 ‘참된 진실’을 작품 속에 쏟아 부어 우리에게 많은 깨달음을 안깁니다. 그의 모든 작품에는 마라이 특유의 삶과 죽음, 사랑과 우정, 운명과 진실 등에 관한 깊은 인식과 통찰이 보석처럼 박혀있습니다.
[출처-yes24]
독백으로 이루어진 독특한 작품들
산도르 마라이를 세계적인 작가의 반열에 올려준 작품은 의심할 여지없이 <열정>입니다. 사실 <열정>의 스토리는 매우 진부하고 통속적입니다. 두 남자와 한 여자, 사랑과 배신에 관한 이야기이지요. 그런데 그가 거장인 이유는 진부한 스토리를 들어 가공할만한 깨달음과 진실의 아픔을 전해준다는데 있습니다. 우선 <열정>은 한 남자의 기나긴 독백을 중심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그의 작품이 소설이라기보다 편지글이나 연극처럼 생생하게 느껴지는 것은 독특한 문체가 가장 큰 이유인 듯합니다. 마주 보고 앉아 가감 없이 생의 비밀들을 풀어헤치는 문체라고나 할까요.
<열정>은 헨릭과 콘라드, 그리고 크리스티나라는 세 사람의 비극적 운명을 그린 소설입니다. 헨릭과 콘라드는 피를 나눈 형제보다 깊은 우정을 가진 오랜 친구입니다. 그들은 서로의 인생에서 증인이 되며 함께 성장해 어른이 되었지요. 24년이라는 시간을 한 몸처럼 붙어 다닌 영혼의 동반자였습니다. 성인이 된 헨릭은 크리스티나라는 아름다운 여인과 결혼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얼마 뒤 목숨처럼 사랑하는 친구 콘라드가 자신의 아내와 불륜관계라는 기막힌 현실과 마주합니다. 게다가 콘라드가 사냥터에서 자신을 죽이려 했다는 사실도 알게 되지요. 얼마 뒤 콘라드는 아무 말 없이 자취를 감추고 남겨진 그들 부부는 적막하고 불행한 결혼생활을 유지합니다. 친구와 아내의 배신에 대한 충격과 절망으로 말을 잃은 헨릭은 8년 가까이 아내와 어떠한 언어도 섞지 않고, 자신을 놓고 도망 가버린 비겁한 연인과 고통에 신음하는 남편 사이에서 크리스티나는 결국 죽음을 선택합니다. 그리고 41년의 세월이 흘렀습니다. 죽음이 가까워진 인생의 마지막 시간에 친구 콘라드가 불현듯 헨릭을 방문합니다. 그리고 마주 앉아 나누는 대화가 이 소설의 본문을 이룹니다. 그들은 어떠한 설명도, 해명도 하지 않습니다. 41년의 세월 앞에 원망도 상처도 모두 옛 것이 되었습니다. 다만 진실과 거짓에 관한 이야기를 가혹하게 파고들 뿐입니다.
“어느 날, 우리의 심장, 영혼, 육신을 뚫고 들어와 꺼질 줄 모르고 불타오르는 정열에 우리 삶의 의미가 있다고 자네도 생각하나? 그것을 체험했다면 우리는 헛 산 것이 아니겠지? 정열은 그렇게 심오하고 잔인하고 웅장하고 비인간적인가? 그것은 사람이 아닌 그리움을 향해서만도 불타오를 수 있을까? 이것이 질문일세. 아니면 선하든 악하든 신비스러운 어느 한 사람만을 향해서, 언제나 그리고 영원히 정열적일 수 있을까? 우리를 상대방에 결합시키는 정열의 강도는 그 사람의 특성이나 행위와는 관계가 없는 것일까? 할 수 있으면 대답해주게”
<열정> 中
모쪼록, 산도르 마라이를 읽기 좋은 날들입니다. 한 해가 어느 새 째깍 째깍 저물어가고, 한 살 더 나이를 먹게 될 것은 완벽한 진실이지만 인생에 대해 도통 아무 것도 모르겠다고 고개를 절레 절레 흔들고 있다면 산도르 마라이를 선택해보는 것은 어떨까요?
©다독다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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