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년 전 신문기사로 본 오늘 (4.19)

2013. 4. 19. 09:43다독다독, 다시보기/이슈연재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 아마 모든 분들이 알고 계실 대한민국 헌법 제1장 제1조와 2조입니다. 그렇다면 그 헌법 전문에서도 인정하는 우리나라의 두 뿌리가 되는 역사적 사건을 아시나요? 바로 3.1 운동과 4.19 혁명입니다. 대한국민은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법통과 불의에 항거한 4.19 민주이념을 계승한다고 적혀있죠. 오늘은 바로 대한민국의 뿌리가 되는 4.19혁명 53주년이 되는 날입니다. 뜻 깊은 날에 당시부터 지금까지 신문 기사들은 4.19를 어떻게 조명하고 있는지 살펴볼게요.



[출처 – 서울신문]




4.19 혁명이 일어난 배경


우리나라의 초대 대통령이었던 이승만은 국민들의 기대와는 달리 안타깝게도 1848년부터 1960년까지 불법적인 개헌을 통해 12년이나 장기 집권을 했습니다. 국회의원 의결 정족수를 반올림이라는 웃기지도 않는 방법까지 동원해 대통령을 연임하려고 했던 이른바 사사오입 개헌도 이때 벌어진 사건이지요.



수학에는 아무런 에누리도 없는 것이고 숫자의 계산에는 조그만치도 거짓이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203표의 삼분의 이 이상이란 몇 표가 되는 것인가 하는 것은 수학 원리 상 스스로 밝혀질 문제이다. 이어 김 대법원장을 203표의 삼분의 이 인 “135.333 이라는 숫자를 사사오입을 하여 135로 간주한다”는 일부 견해에 대해 언급하며 자기로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논법이라고 말하면서 다음과 같이 부연했다.(후략)


수학엔 에누리가 없다 사사오입이란 이해할 수 없는 것 (동아일보, 1954-11-30)



이처럼 눈 가리고 아웅 하며 권력을 연명하던 이승만 정권과 자유당은 1960년 3월 15일 민주주의 국가에서 저질러선 안 되는 짓을 저지르고야 맙니다. 바로 부정선거지요.



최인규는 검찰의 심문에서 "내가 어떠한 수단 방법을 써서라도 자유당 공천 정·부통령 입후보자들을 당선시키라"고 지시했음을 자인하고 "3인조나 9인조 편성을 지시한 일은 없다" 고 진술했다. 또한 '최'는 "내가 부정선거를 지시한 외에 내 위에 어떤 사람도 부정선거 감행에  사주한 사람은 없다" 고 진술하고 있는데 검찰은 '최'를 철야 심문 중이다.(후략)


내가 모두 시켰다. 최인규 3.15 부정 사실 자백 (경향신문, 1960-04-30)



제4대 정부통령 선거에서 자유당은 반공개 투표에다가 야당 쪽 참관인을 쫓아내는데 그치지 않고 투표함을 바꿔치기하고 득표수를 조작 발표하는 등 차마 눈 뜨고 볼 수 없는 짓들인데요.



[출처 – 서울신문]



이 소식을 듣고 분노한 마산의 시민과 학생들이 부정선거를 규탄하며 거리로 쏟아져 나와 격렬한 시위를 벌였습니다. 이 과정에서도 이승만 정권은 부정 선거를 규탄하는 시민을 총과 폭력으로 강제 진압했습니다. 자국의 시민을 상대로 총을 쏘고 군홧발로 짓밟아 단지 의로운 분노로 거리에 나온 사람들이 죽고 다쳤습니다. 살아남은 무고한 학생과 시민도 빨갱이로 몰아 고문했지요.



그리고 1960년 4월 11일. 이 마산 시위에서 실종되었던 김주열 군의 시신이 발견됩니다.




참혹한 시신으로 발견된 김주열 열사와 분노한 학생들의 항거


발견된 김주열 군의 시신은 참혹하기 그지없었습니다. 시위 도중 경찰이 쏜 최루탄이 눈에 박혀 차마 볼 수 없는 모습이었습니다.



[출처 – 서울신문]




부산지방 검찰청에서는 13일 하오 4시 30분부터 11일 마산시에서 시체로 발견된 김주열 군의 검안에 착수하여 이날 하오 7시에 끝마쳤다. 김군의 눈에 박힌 그 최루탄의 형태를 보면 인위적으로 박은 것 같은 흔적이 있어 그에 대한 검찰 해명이 지극히 어려운 문제로 등장하고 있는가 하면 죽은 시체가 바다 속에 제 발로 걸어 갈 수 없는데도 불구하고 바다 속에서 시체로 발견되었다는 문제는 어쨌든 확실히 밝혀져야 할 문제이어서 검찰은 이 시체의 의문을 풀어주기 위하여 상당한 고민에 빠질 것 같다.(후략)


눈에 박힌 포탄은 최루탄 (동아일보, 1960-04-14)



자신들과 동년배인 김주열 군의 참혹한 죽음. 1960년 4월 18일, 이 사건에 분노한 고려대학교 4천여 명의 학생은 진정한 민주이념의 쟁취를 위해 봉화를 높이 들자는 선언문을 낭독하고 국회의사당까지 진출합니다. 그들의 의로운 분노는 사람들의 지지를 얻기 시작했는데요. 고대생들이 다시 학교로 돌아가던 도중 정권의 사주를 받은 것으로 보이는 괴한들에게 습격을 받아 피를 흘리고 쓰러지게 됩니다.



이 일련의 사건들을 지켜본 다른 학생들과 나아가 시민은 큰 충격을 받습니다. 그리고 그 충격은 다음날 전국적으로 들불처럼 일어나는 분노가 됩니다.




1960년 4월 19일, 부정선거를 일삼는 독재에 맞서 일어난 민주주의 혁명


학생들의 정의로운 행동을 총과 폭력으로 찍어 누르던 이승만의 독재 정권은 그 반작용으로 더 크고 뜨거운 투쟁에 직면하게 됩니다. 김주열 열사의 참혹한 시신과 이에 항거하는 고대생들까지 피를 흘리자 1960년 4월 19일, 분노한 시민과 학생들이 전국에서 궐기합니다. 더 이상은 부정선거 규탄이 아니라, 이 모든 사태를 불러온 이승만의 하야와 독재정권 타도를 요구하는 혁명으로 발전한 거죠. 하지만 이승만 독재 정권은 다시 총과 폭력을 앞세워 이 혁명을 위한 투쟁을 탄압하고 비상계엄령을 선포하기에 이릅니다. 수많은 시민의 피가 거리에 다시 한 번 흐르게 되었습니다.




[출처 – 서울신문]



18일의 고대학생 데모에 뒤이어 19일에는 국립 서울대학교의 전 학생들과 성균관·동국·경기·중앙·연세·홍익 대학생 등, 약 십만 명이 대대적인 데모를 감행하여 수도 서울을 완전히 데모 분위기 속으로 휘몰아 넣었다. 경관은 본격적으로 실탄과 최루탄을 발사하여 일부 학생들이 현장에 쓰러지기 시작 이날 하오 5시경 경무대 어구부터 경찰은 데모대를 해산시키기 위하여 본격적으로 총격을 개시. 수십 명의 사망자와 헤아릴 수 없을 정도의 부상자를 내었다.(후략)


전 수도의 거리 뒤흔든 학생들의 노도 (동아일보, 1960-04-20)



경무대 앞에 학생만 수만 명이 넘을 정도로 시민이 모였지만 이승만 독재 정권으로부터 돌아온 대답은 무차별 총격이었습니다. 4.19 당시의 살인 진압으로 모두 186명이 숨졌으며 7천여 명이 부상을 입었습니다. 숨진 사람 가운데는 14살밖에 안 되는 소녀도 있었습니다.



[출처 – 서울신문]



진양은 4.19날 어머니 앞에 "남들이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치고 있는데 내가 어찌 편안히 있겠습니까. 내가 안 돌아오더라도 슬프게 생각하지 마십시오" 라는 내용의 유서까지 써놓고 뛰어나가 데모대에 뛰어들었다 미아리 고개에서 무분별하게 쏘아대는 총알에 맞고 숨진 것이다. 그의 어머니 김명옥씨는 죽은 딸의 사진을 쳐다보며 시종 눈에 손을 대고 울기만 했으며 "가슴이 메어 말을 못하겠다" 고 했다.(후략)


4.19 때 쓰러진 진 양에게 명예 졸업장 수여 (경향신문, 1962-02-06)



이렇게 아이들과 학생들의 피가 거리 위에 강처럼 흐르기 시작하자 결국 어른들과 전 국민이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1960년 4월 25일 서울 시내를 포함한 각 대학 교수단 3백여 명은 시국선언문을 채택하고 학생과 시민과 함께 거리로 뛰쳐나와 시위에 동참했습니다. 그리고 4월 26일 정권의 탄압에도 굴하지 않고 뛰쳐나온 대한민국의 시민이 서울 시내를 가득 메운 가운데 이승만 대통령은 대국민 담화문을 통해 하야를 선언합니다. 12년에 걸친 독재가 종식된 것이죠. 이승만은 하와이로 망명길에 올랐고 2인자였던 부통령 이기붕은 4월 28일 경무대에서 가족들과 자살합니다. 이로써 이승만과 자유당의 독재는 막을 내리고 시민은 혁명을 성취합니다.



퇴색되는 4.19 우리가 기억해야 할 때


그 이후 다 아시겠지만 4.19는 명칭에서부터 부침을 겪게 됩니다. 이승만을 몰아낸 직후 4월 혁명, 4.19 혁명, 4.19 학생 혁명, 4.19 민주 혁명으로 불리던 것이 5.16 쿠데타로 인해 4.19 학생 의거로 그 의미가 축소됩니다. 하지만 군사독재가 종식되고 문민정부가 들어서면서 다시 4.19 혁명으로 환원되게 되지요.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 기간 동안 4.19를 이룬 분들을 사회는 제대로 돌봐드리지 못 했습니다.



남편의 간병을 맡고 있는 부인 조명자 씨에 따르면 윤씨는 그날 입은 머리의 상처로 오랫동안 투병, 한때 건강이 좋아져 도봉구 상계동에 비닐하우스를 짓고 채소재배를 하기도 했으나 10년 전부터 일을 할 수 없을 정도로 몸이 나빠져 자신이  채소장사를 하며 매달 보훈처에서 지급하는 연금 19만 4천 원으로 중고등학교와 국민학교에 다니는 다섯 자녀를 키우고 있다는 것. 그나마 윤씨가 병원에 입원한 뒤부터는 연금만이 생활비 모두라는 것이다. 정신병동에 입원해있는 K씨(45)와 L씨(51)도 4.19 당시 머리에 입은 상처로 정신분열증에 시달리고 있는데다 말을 제대로 하지 못한다.(후략)


퇴색하는 4.19 예산 줄어들고 묘지 기념탑 관리 갈수록 소흘 (동아일보, 1986-04-19)



4.19와 오늘의 중간점이었던 1986년에도 4.19의 의미가 퇴색하고 있다는 위기감이 많았던 것 같습니다. 다행히 문민정부와 국민의 정부를 거치면서 혁명으로 복원되었고 4.19는 혁명에 걸맞은 지위를 찾게 되었습니다. 요즘은 기리는 방식도 다양해져 문화제로 꽃피우고 있기도 하고요.



[출처 – 서울신문]



강북구는 4·19혁명 제53주년을 맞아 18일부터 20일까지 우이동 국립4·19민주묘지 등에서 ‘4·19민주혁명 국민문화제’를 개최키로 했다. 박겸수 강북구청장은 15일 서울시청에서 기자설명회를 열고 “국민문화제를 통해 4·19 정신을 재조명하고 국민들의 가슴 속에 다시 살아 숨쉬는 4·19로 승화시킬 수 있도록 하겠다”고 밝혔다. 박 구청장에 따르면 국민문화제는 ‘피어나라, 4·19! 타올라라, 통일의 불꽃이여!’를 주제로 펼쳐진다. 그는 민주묘지와 강북구청사거리∼광산사거리 일대를 중심으로 다양한 문화·교육·참여·전시행사를 마련했다고 소개했다. (후략)


‘문화제’로 꽃피는 4·19혁명 (서울신문, 2013-04-16)



벌써 53주년, 반세기가 넘은 4.19가 오늘입니다. 잠시 잠깐이라도 그때 피를 흘리며 쓰러져도 우리나라의 민주주의를 위해서 일어섰던 분들에 대해 생각해보아야겠습니다. 우리가 지금 누릴 수 있는 자유의 근간을 만들어주신 분들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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