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 최초 대법관의 꿈을 키워준 김영란의 독讀한 습관

2014. 11. 26. 09:00다독다독, 다시보기/현장소식



제법 쌀쌀해진 날씨에 몸이 움츠러듭니다. 이럴 때는 따뜻한 커피 한 잔을 마시면서 몸도 마음도 녹이는 여유가 필요하죠. 그리고 자신을 따뜻하게 해줄 강연을 듣는 것도 좋습니다. 지난 11월 20일에도 그런 강연이 서울 프레스센터에서 있었는데요. 바로 ‘김영란 전 대법관의 독讀한 습관’강연입니다. 그녀는 왜 다른 사람이 되길 꿈꾸었는지 지금부터 그날의 현장으로 가보실까요?



 인생을 좌우했던 ‘토니오 크뢰거’


“제 삶에 거의 대부분에 영향을 주었던 책은 토마스 만이 지은 ‘토니오 크뢰거’였어요.”


김영란 전 대법관은 여행을 떠날 때, 가장 먼저 하는 일이 가서 무엇을 보고 어떻게 옷을 입을까 하는 것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여행 기간 동안 어디서 책 읽기가 좋고, 몇 권의 책을 읽을 것인가를 고민한다고 하네요. 그러면서 세상에서 누릴 수 있는 중독들이 있는데, 그 중에서 가장 경제적이면서 삶에 도움이 되는 중독이 바로 ‘독서’가 아니겠냐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이렇게 책을 좋아해서 읽은 것은 어릴 적부터라고 합니다. 집에 문학전집이 있었는데, 그것을 읽다 보니 재미를 붙였다고 해요. 그리고 그렇게 독서에 빠져들면서 알고 싶은 것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해 책을 읽게 되었다고 합니다. 청소년이 되어서는 친구들의 언니나 오빠들이 읽는 책을 빌려서 읽기도 하고, 도서관을 찾아 책을 읽었다고 하네요. 





그러다가 자신의 삶에서 빼놓을 수 없는 책을 만났다고 합니다. 바로 독일 작가 토마스 만이 쓴 ‘토니오 크뢰거’인데요. 이 책은 북독일의 이성과 도덕관을 가진 사업가 아버지와 남독일의 열정과 예술적 재능을 어머니에게 물려받은 토니오 크뢰거라는 주인공이 내면의 갈등을 어떻게 해결하고 중도적인 길을 가는지 보여준다고 해요. 


이 책에서는 시민과 예술가라는 양극단적인 사람들이 나옵니다. 토니오는 자신의 동급생인 한스와 잉에가 사는 시민적 삶을 동경하면서도 예술적인 감정과 생각으로 시민세계의 속물성에 대한 멸시를 합니다. 그러다 리자베타라는 아름다운 여인을 만나 사랑을 하고 “시민적 사랑”이라고 말하는 중도적인 길을 표방하게 됩니다.


책을 읽고 나서 김영란 전 대법관은 자신의 모습이 토니오를 닮았다고 규정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나는 인생과 거리를 두고 밖에서 사는 인간’이라고 정해놓고 세상을 관찰하는 자로 살게 되었다고 하네요. 삶에서 한 발자국 거리를 두고 마치 그저 관찰하는 것이 전부인 듯이 욕망도 숨기고 표현하지 않으면서 말이죠. 게다가 책 속에 나온 인물들로 만나는 사람들을 평가했다고 해요. ‘아, 저 사람은 한스 같은 사람이구나. 이 사람은 토니오 같은 사람이구나.’하면서 세상을 ‘토니오 크뢰거’에 넣어서 보았다고 합니다. 그렇게 살다가 거기서 벗어난 것이 불과 몇 년이 되지 않았다고 하니, 책 한 권이 그녀의 삶에 엄청난 영향을 주었던 것입니다. 


 



 생각 없이 책을 읽어도 삶에는 녹아들어


그러다보니 강연의 주제처럼 ‘나는 다른 사람이 되길 꿈꾸어왔다.’라는 것이 늘 있었다고 해요. 이러한 생각은 미셀 투르니에의 ‘흡혈귀의 비상’이라는 책에서 더욱 재미있게 찾아볼 수 있다고 합니다. 그 책에는 프랑스와 유럽의 문학, 사회사라고 불릴 정도로 수많은 작가와 작품이 모여 있다고 해요. 그런데 재미있게도 미셀 투르니에는 이들을 이분법으로 분류했다고 합니다. 1차적 인간은 세상과 내가 하나이면서 현재와 일치하는 직관적인 성향이라면, 2차적 인간은 세상과 나를 분리해서 거리를 두고 보며 과거나 미래에 대한 공상이 많은 성향이죠. 그러나 2차적 인간은 항상 1차적 인간이 되길 갈망한다고 합니다.


김영란 전 대법관은 자신도 돌이켜보면 이분법으로 세상과 나를 분리해서 지내는 것을 당연하다고 생각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세상과 거리를 두고 살았죠. 실제로 자신이 대법관이 되었다는 것도 새로운 법을 만들어 통과 시켰던 것도 그다지 중요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일은 일이고 자신은 자신이라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어느 날, 그녀는 헤르만 헤세의 책을 읽고 있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남편이 “왜 당신은 생각 없이 책을 읽어?”라는 말을 했고, ‘난 책 읽는 것이 좋아서 읽는 것인데, 왜 생각이 없이 책을 읽냐는 이야기를 들었을까?’라는 의문이 들었다고 하네요. 그 답은 풀리지 않았는데, 이번 강연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조금은 풀렸다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제가 책을 읽었던 이유는 아마도 생각을 하지 않고 있는 저를 잊기 위해서였죠. 책을 읽는 다는 것은 저에게 일종에 명상이었어요. 마음을 차분하게 해주고 책을 읽는 그 순간에는 나를 내려놓고 세상을 만날 수 있었으니까요.”





마지막으로 김영란 전 대법관은 자신이 책을 읽을 때는 직업에 관련된 내용은 거의 읽지 않았다고 합니다. 늘 직업과 책 읽기는 분리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고 해요. 그래서 법원에 있을 때는 대법관이지만, 법원 밖으로 나오는 순간부터는 자유롭게 세상을 만나고 끊임없이 샘솟는 지식에 대한 갈망을 책으로 채웠답니다. 그래서인지 직업에 관련 없는 수많은 책들을 탐독했다고 하네요. 


그러다 어떤 작가가 법관의 자세에 대해 ‘시적 정의’라고 언급한 내용을 보았다고 합니다. 소설을 읽을 때, 사람들은 책 속에 자신을 몰입해서 공감하면서, 때론 ‘나라면 저렇게 하지 않았을 텐데’라는 비판을 하게 된다고 합니다. 이것이 법관이라면 가져야 하는 자세라고 말이죠. 이런 자세는 ‘제인에어’를 읽으면 더 확실하게 알 수 있다고 하는데요. 그것은 그 속에 나오는 집마다 서로 다른 이야기들에서 찾을 수 있다고 합니다. 이처럼 문학은 개개인의 삶을 볼 수 있게 하죠. 그래서 법관 또한 법률이라는 커다란 틀에서 획일 속에 포함될 수 없는 개별성을 찾아 적합하게 법을 적용해야 한다는 내용입니다. 


이 내용을 읽고 나서 김영란 전 대법관은 그동안 자신의 독서 습관이 잘못된 것이 아니라는 확신이 들었다고 해요. 그동안 읽었던 많은 소설과 기타 다른 책들이 세상을 보고 판단하는 것에 녹아들어서 판결을 내리는 동안에도 작용했다는 것입니다. 책을 읽는 다는 것은 자신의 삶에서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녹아 다른 사람으로 만드는 방법이었다고 합니다.





 영혼을 뒤흔드는 충격, 그것은 ‘책’


강연이 끝나고 이어진 시간에는 문지애 아나운서의 진행으로 청중과 함께 질문과 답변을 나누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300여 명이 되는 사람이 강연을 듣고 기다렸다는 듯이 질문을 이어갔는데요. 그중에서 몇 가지를 소개해드리겠습니다.



  많은 사람에게 책 읽는 습관을 추천하신다면 어떤 것이 있을까요?

 앞에 강연에도 말씀을 드렸듯이 저는 책을 다른 사람에게 읽으라고 추천하지 않죠. 제가 책 한 권으로 얼마나 영향을 받았는지 절실히 느끼며 살았기 때문이에요. 책 한 권은 어떤 사람의 인생을 좌우할 수 있는데 어떻게 책을 읽으라고 하겠어요. 


제가 겪은 일화를 하나 소개할게요. 대부분 사람들은 유명한 전시회를 가요. 이름이 있고 많은 사람이 가는 그런 전시회를요. 하지만 이곳은 이미 평가가 끝난 전시회에요. 그래서 막상 가서 보면 마음에 와 닿는 전시품이 없을 때가 많아요. 한 번은 친구의 지인 전시회를 갔어요. 고등학교 선생님 두 분이 한 그림 전시회였는데, 갑자기 너무 사고 싶은 그림을 본 거에요. 아마추어가 그렸지만, 너무나도 갖고 싶을 정도로 느낌이 왔죠. 친구가 미리 사기로 한 그림이라 아쉽게 사진 못했지만요.


제가 그림을 본 것처럼 책을 보는 것은 같아요. 어느 순간에 충격을 주는 책을 만날 수 있죠. 그 충격은 사람마다 다르기 때문에 자신이 경험 했던 충격을 다른 사람도 경험할 것이라고 확신하는 것은 잘못이죠. 경험이라는 것이 정해진다고 줄 수 있는 것이 아니에요. 그래서 책을 통해서 생긴 충격은 정말 소중하고 자신만의 고유한 것이죠. 세상에 영혼을 뒤흔드는 충격을 꼽으라면, 당연히 책이라 말하겠어요. 그런 충격을 원한다면 책을 읽으셔도 돼요.





  어린 시절에 어른들이 많이 하는 ‘책을 읽어라’라는 소리를 들어 보셨나요?

  어릴 때부터 책을 좋아해서 늘 책을 잡고 있었기 때문에 들어보지 못했네요. 저는 읽을 수 있으면서 내 지식욕을 채워줄 수 있는 것이라면, 만화책이라도 읽어요. 지금도 아이들이 엄마에게 추천하고 싶은 만화책이라고 하면 함께 읽죠.  


  그러면 아이들에게 책을 읽으라고 잔소리를 하신 적은 있나요?

  지금까지 자녀들에게 책을 읽으라고 한 적이 없어요. 오히려 내가 책을 너무 읽어서 아이들에게 부담을 주진 않을까 걱정이죠. 그런데 제가 책을 읽는 것은 저의 습관이지 자녀들의 습관이 아니잖아요? 그래서 그들 나름의 책 읽기를 존중하는 편이에요. 책을 읽고 안 읽고는 자녀들이 선택할 문제니까요.


 



 책 읽기와 친해지는 방법이 있다면 어떤 것이 있을까요?

 책을 무조건 친해지는 것은 어려운 일이에요. 쉽고 간단한 책부터 시작하면 좋죠. 아이들의 동화책도 좋고, 읽으면서 부담 없는 만화책도 좋아요. 그런 책이라도 한 권의 책을 읽으면, ‘이 책은 나에게 무슨 질문을 하고 있을까?’하는 생각을 해보세요. 그리고 해답을 자신이 찾아보는 거죠. 그런 뒤에 또 다른 새로운 질문을 찾아서 조금 더 어려운 책을 읽는 식으로 천천히 친해지는 것도 방법이랍니다. 


독후감보다는 자신의 느낌을 한 줄이라도 적어서 놓는 것이 더 도움이 되요. 책을 줄여 내용을 정리하는 독후감은 많이 읽다보면, 자연스럽게 할 수 있어요. 하지만 자신만의 느낌을 적는 것은 자신의 생각을 넓히는 것이라 책을 많이 읽는다고 해서 자연스럽게 따라오는 것이 아니에요. 그러니 자꾸 해봐야겠죠?





  일과 관련된 책이 아닌 다른 분야의 책을 읽어서 좋은 점은 무엇인가요?

  책을 읽으면 완전히 다른 세상에 잠시 다녀올 수 있는 있는 것이라 생각해요. 그 세상을 통해서 자신의 생각이 넓어지는 것이고 자연스럽게 일과 관련되어 연결이 되는 부분이 생기면서 도움이 되니까요. 그게 가장 큰 좋은 점이에요. 


  취업으로 고민에 빠진 청년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 있으신가요?

  달리는 열차에서 뛰어내려 봐야 한다고 말하고 싶네요. 자신이 처한 처지에 그냥 몸을 실은 채 달리는 것이 아니라 한 번은 뛰어내려서 다른 열차를 타야 해요. 그것이 열차가 아니라 걷는 것이 될 수도 있고 물 위를 헤엄쳐야 하는 것일 수도 있으나 뛰어내린다는 것은 본인이 선택해야 하죠. 


  책을 고를 때 어떻게 고르시나요?

  대부분 먼저 읽은 책이 책을 낳는데요. 먼저 읽은 책을 통해서 그 분야나 주제에 관심이 생기면 관련된 책을 더 사서 보게 되죠. 책을 살 때는 아날로그 적인 방법으로 직접 서점을 가는 걸 좋아해요. 가서 책을 중간 중간 펴서 읽어보고 괜찮다 싶으면 구매하죠. 그러다보니 궁금해진 내용에 대한 책을 많이 골라서 서점에서 배달해줘야 할 정도가 됐던 적도 있네요.





김영란 전 대법관은 잔잔하면서도 담담하게 그리고 소탈한 모습으로 강연을 했습니다. 그녀가 이야기한 독서 노하우로 모두가 지금의 자신과는 다른 모습으로 바뀌길 바랍니다. 앞으로 딱 한 번 더 독讀한 습관 강연이 남았는데요. 만화가 강도하씨의 강연이랍니다. 12월 4일 오후 7시 30분에 서울 프레스센터 20층 국제회의실에서 진행될 예정이니 관심 있는 분들은 참석해서 함께 읽기 노하우를 들어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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