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전명 발키리'를 보며 떠오른 기억, 세월호 참사!

2014. 12. 30. 13:00다독다독, 다시보기/지식창고

출처_ 대구가톨릭대학교



어느덧 한 해가 저물어가고 있습니다. 올해 대한민국 사회를 되짚어보는 키워드를 하나 고르라면 ‘상실’이라 답하고 싶습니다. 뜻하지 않은 상실이 많았던 2014년이었던 듯싶습니다. 아직 현재 진행형이라 할 수 있는 세월호 사건은 많은 국민들에게 커다란 상실감을 주었지요. 2014년의 끝자락에서 다시 한 번 기억해보고 싶습니다. 영화 한 편과 함께 말입니다. 오래 전 히틀러 암살 작전에 실패한 독일 군인들의 이야기를 다룬 영화 <작전명 발키리>입니다. 실화를 바탕으로 한 이 작품은 절망을 그리고 있습니다. 굳이 이 절망적인 이야기를 복원하여 요즘 관객들에게 보여주려고 했던 까닭은 무엇일까요? 영화를 보면서 해피엔딩이 아닌 새드엔딩을 구태여 리메이크한 이유가 무엇인지에 대해 고민해보았습니다.



  절망의 본질을 생각해보게 하다


<작전명 발키리>의 오프닝 장면은 거대한 하켄크로이츠(Hakenkreuz) 깃발과 함께 시끄럽게 울려 퍼지는 나치 당원들의 서약(an Oath)으로 시작됩니다. 목숨을 바쳐 히틀러에게 충성하겠다는 내용이지요. 히틀러 암살을 도모하는 비밀 결사대가 새 조직원으로 주인공 슈타펜버그(톰 크루즈 분) 대령을 불러들였을 때, 그는 대원들에게 묻습니다. “히틀러가 죽은 다음엔 어떻게 할 거요?” 이어 대령은 사건의 본질을 정확히 꿰뚫는 발언을 합니다. “군인들이 맹세한 서약은 히틀러가 죽는다고 해서 사라지지 않소.” 제거해야 할 대상은 독재자 한 사람만이 아니라, 그가 퍼뜨린 ‘서약’임을 지적한 것입니다. 서약을 무효화시키려면, 그것의 전도사들을 꺾어내야만 하겠지요. 히틀러는 물론이고, 동생인 히믈러와 그 주변인들까지 처리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잡초를 뽑아낸 뒤, 마무리 단계로 잔디밭 곳곳에 제초제를 뿌리듯 말입니다. 이런 핵심을 슈타펜버그는 인지하고 있었습니다. 


지배 구조란 그런 게 아닐까요. 지배 계층이 허물어지는 순간, 피지배 계층은 어찌 할 바를 모르게 되는 것. 지배자의 지배에 강력하게 길들여진 피지배자는, 한 지배자가 소멸해도 얼마 지나지 않아 다른 지배자의 지배를 기다리게 되는 법입니다. 이런 메커니즘이 영화 속에서 매우 직접적으로 묘사되는데, 바로 통신실 장면입니다. 슈타펜버그가 히틀러 암살을 기도하며 폭탄을 터뜨린 후, 그의 결사 조직은 히틀러의 사망을 기정사실화하는 공문을 독일 내 전 부대에 급전합니다. 그런데 나치당 충성파에서는 히틀러는 아직 건재하며, 암살자들을 모두 체포하라는 명령문을 송신하지요. 서로 다른 양 진영의 메시지를 받은 통신실 담당관은 갈등합니다. 어느 쪽을 내보내야 이로울 것인가. 히틀러가 죽었다? 히틀러는 살아 있다? 대단히 시니컬한 장면입니다. 위기의 순간에 이쪽과 저쪽이라는 타성의 세계에서 발만 동동 구르는 모습이라니요. 영화에서 한가롭게 수영이나 하고 이발에 꽤 공을 들이던 한량 미남 장교의 대사 역시 가관입니다. “어느 쪽에 서야 하는지 말하기가 어렵군.” 



출처_ 네이버 영화 <작전명 발키리>  



슈타펜버그 대령과 그 일원들의 실패 요인은, 그들과 뜻을 함께할 ‘나’들이 부족했기 때문입니다. 히틀러를 죽여도, 히믈러를 죽여도, 서약을 죽여도, ‘나’들이 없다면 또 다른 히틀러와 히믈러와 서약이 재생될 테니까요. 서약 자체가 이미 ‘히틀러에게 나를 바친다’는 주제의식으로 가득하기에, 서약을 받든 대다수의 군인들은 ‘나’가 없는 존재들인 셈입니다. ‘나’가 없는 사람들은, 당연한 이야기겠지만, 결코 스스로 판단하거나 행동하지 못하는 법입니다. 


그렇다면 슈타펜버그는 군인이 아닌 일반 대중을 포섭해야 했을까요? 그 또한 쉬운 일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길거리 총살이 대낮에 버젓이 집행되고, 한 무리의 발가벗겨진 사람들이 가스실에 감금되어 질식사하는 현실 속에서 ‘나’들이 존재하기란 어려운 일입니다. 그걸 기대하는 것도 어쩌면 매우 폭력적인 인식일지도 모르고요. 어쨌든 슈타펜버그 대령은 일반 서민이 아니라 명백히 집행자이자 지휘권자의 위치였으니, 그런 안전망으로 말미암아 자신만의 ‘나’를 정립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야말로 총체적 난국이지요. 이것은 명백한 ‘절망’입니다. 



출처_ egloos by glasmoon  



  아는 것과 기억하는 것 

 

그럼에도 이 절망을 보여주려 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결말이 뻔히 다 알려진 이야기를, 해피엔딩도 아닌 이 비극을 굳이 왜 꺼내든 것일까요. 스토리텔링 측면에서 접근해보겠습니다. ‘끝’은 모두가 안다, 바뀔 수 없다, 그대로 놓아두어야 한다, 그렇다면 스토리텔러가 손질하고 칼질할 수 있는 부분은 ‘과정’입니다. 이때, 불변의 새드엔딩이라는 점은 장애가 아닌 축복으로 변모합니다. 이야기가 비극으로 치달을수록, 그 과정은 더욱 비장하고 치열해지니까요. 해피엔딩을 꿈꿨던 등장인물들의 모든 행동과 대사와 표정 들은 가공할 만한 진정성으로 관객들의 정서를 후비고 들어올 것이고, 따라서 ‘기억’될 것입니다. 


얼마 전 페이스북 타임라인에서, 단원고 학생이 서서히 침몰 중인 세월호 선실 안에서 친구들을 찍은 휴대폰 영상 복원 파일을 보았습니다. 아이들은 대부분 웃고 있었습니다. 어떤 아이는 과자를 먹고 있기도 했습니다. 하기야, 그런 크고 튼튼해 보이는 배가 바다 한가운데에서 가라앉고 있다는 사실은―그로 인해 살아남지 못할 수도 있다는 가능성은―아직 20년도 채 살지 않은 아이들에게 매우 비현실적으로 느껴졌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그중 한 여학생이 아빠엄마에게 미안하다며 갑자기 울음을 터뜨립니다. 그러자 밝은 표정의 다른 여학생이 장난스럽게 핀잔을 줍니다. “살 건데 무슨 개소리야. 살아서 보자.” 그 다음은, 우리 모두가 알다시피, 살아서 본 아이들도 있고, 그리하지 못한 채로 본 아이들도 있으며, 끝내 바닷속으로 몸을 감춘 아이들도 있습니다. 이 영상을 촬영한 여학생의 이름 앞에 지금은 ‘희생자’라는 끔찍한 단어가 따라다닙니다. 이제는 결코 바뀌지 않고 모두가 다 아는 ‘끝’이기에, 그 끝으로 가고 있던 당사자들의 마지막 영상은 우리를 숙연하게 합니다. 기우는 배 안에서 깔깔대고 군것질을 하고 울고 아빠엄마를 부르던 그 모든 장면들은 바다 속으로 가라앉고 있는 순간의 ‘과정’들이었던 것이니까요. 



출처_ MBC '무한도전' 멤버들, 안산 임시 합동분향소 찾아 조문 / 2014.04.25. / 경기일보



<작전명 발키리>를 보는 내내 세월호가 떠올랐습니다. 영화 속 슈타펜버그 대령과 그 동료들이 결국 히틀러 암살에 실패하여 한밤중에 한 사람 한 사람씩 총살을 당하리라는 ‘끝’을 알고 있기 때문이었겠지요. 히틀러 사망을 기정사실화하고 신속하게 반나치 세력들을 호집하며 뿌듯해하는 그들의 모습에서 자꾸만 세월호 영상 속 아이들이 떠올랐습니다. 새드엔딩임을 아는 채로 끝까지 봐야 하는 일이란 정말이지 괴롭습니다. 그럼에도 봐야만 합니다. 그들이 비극의 끝으로 가는 동안 ‘어떻게 살아 있었는지’, 그 과정을 생생히 기억해야만 하기 때문이지요. 그 과정을 잊는다면 끝도 잊게 됩니다. 아는 것과 기억하는 것은 다릅니다. ‘1 더하기 1은 2이다’는 아는 것이고, ‘그 2는 단순히 1과 1이 더해진 값이 아니라 0.01과 0.2와 0.36과 0.47 등등이 모여 합쳐진 결과였다’는 기억하는 것입니다. 


이 영화에는 “히틀러의 독일(Hitler's Germany)”이라는 대사가 몇 차례 반복됩니다. 히틀러의 소유격으로 표현되던 이 나라는 아주 느린 속도로 침몰 중이던 전함이었던 셈이지요. 독재자 히틀러로부터 근원한 ‘서약’의 플러그들이 나치 당원과 군인들의 뇌에 꽂혀 있었고, 그들의 과신과 맹신과 몰아가 비대해질수록 독일은 서서히 기울어갔던 것입니다. 그 기울기가 한쪽 끝에선 상승처럼 보였고, 다른 끝에선 추락 같았을 것입니다. 시소의 양 끝처럼 말이지요. 슈타펜버그는 딱 그 중간 지점에 있었던 인물이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시소의 치솟은 쪽 무게를 줄여 다시금 평형을 맞추려 했던. 다시 말해, 그는 독일이라는 거대한 배 안에서 ‘살고자 했던’, 그리하여 다시 가족의 품으로 돌아가려 했던 사람인 것입니다. 



출처_ 네이버 영화 <작전명 발키리> 



굳이 이 절망을 보여주려 한 이유, 봐야 하는 이유는 간명합니다. 기억해야 하기 때문에. 기억해야만 우리가 온전히 살 수 있기 때문에. 상징적인 의미에서 세월호는 여전히 기울어 있습니다. 아직 완전히 가라앉지 않았다고 믿습니다. 다만, 어딘가 한쪽의 무게중심이 지금 맞지 않고 있지요. 어느 쪽은 비정상적으로 솟구쳐 있고, 또 다른 쪽은 터무니없이 고꾸라져 천대받고 있습니다. 극단적인 각도로 오르락내리락하는 시소의 형국입니다. 우리가 어디쯤에 걸터앉아 있느냐에 따라 이 시소가 평형을 맞출 수도 완전히 엎어질 수도 있습니다. 어디에 있는지를 알아야 어디로 가야 하는지를 알 수 있겠지요. 적어도 영화 속 슈타펜버그 대령은 그걸 정확히 알았으며, 아는 대로 행동하다 살았고 죽은 사람이었습니다. 


우리가 생각의 무게를 맞춰야 할 방향은 어디 인가. 잔뜩 기울어진 채로 고꾸라져 있는 생각들은 없는가. 미처 구조하지 못한 순수한 가치들이 내면의 깊은 심연 속으로 실종되지는 않았는가. 그 잃어버린 순결함을 우리는 얼마나 적극적으로 수색했었나. 머뭇거리는 사이, 지금 아름다운 생각 하나가 희생될지도 모릅니다.



ⓒ 다독다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