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년전, 대북 확성기 심리전의 추억

2015. 8. 21. 14:00다독다독, 다시보기/이슈연재



북의 심리전, 남의 심리전


심리전(心理戰)은 물리적 전쟁과 병행하여 혹은 물리적 전투를 기다리지 않고 특정한 집단의 의식에 작용하여 그 전투의사를 감퇴·박탈 또는 조작하는 전쟁 형태를 말합니다. 정전 상태인 남과 북은 휴전선을 경계로 그동안 대북-대남 심리전을 꾸준히 전개해왔습니다. 남북화해 분위기가 고조된 2004년 남북 장성급 회담 결과에 따라 6월 15일부로 군사분계선, 비무장지대에서의 심리전이 일절 중단됐고 관련 장비들이 철거된 바 있습니다.


대북 확성기 방송은 전단과 함께 대표적인 대북 심리전 무기입니다. 군은 2010년 북한의 천안함 폭침 도발에 따른 5·24 대북 제재조치의 하나로 이를 재개키로 했었지만 가요 등을 틀어주는 FM 방송만 내보냈을 뿐 직접 심리전을 수행하는 확성기 방송은 하지 않았습니다.


군 당국은 2015년 8월 4일 발생한 비무장지대(DMZ) 내 목함지뢰 폭발 사건을 계기로 중·서부 전선을 포함해 2개소에서 대북 확성기 방송을 재개했습니다. 확성기 방송 내용은 북한을 비방하는 내용보다는 우리 체제의 우수성을 홍보하고 북한 도발의 부당성을 알리는 데 초점을 맞출 것이라고 군 소식통은 전했습니다.


인민군의 두 귀를 설득하라


한국군의 대북 심리전 방법으로는 FM 방송 송출, 풍선을 이용한 전단 살포, 대북 확성기방송, 야간 전광판 등이 있습니다. FM방송은 수신장치가 있어야 청취가 가능하지만 전방에 배치된 고성능 대북 확성기를 통해 방송을 보내면 남과 북 모든 군인들이 들을 수 있습니다. 확성기는 북한 인민군에게 잘 들릴 수 있는 지형을 선택해서 설치합니다. 방송 프로그램은 국군 심리전단에서 제작하여 FM 방송으로 송출하면 전방 국군 초소에 있는 심리전 요원이 확성기를 통해 북쪽에 내보내는 방식입니다.


보통 하루에 15~16시간을 방송되는데 심야시간대에 방송 효과가 높습니다. 사방이 깜깜한 야간 경계근무에 투입되는 군인들이 모두 눈과 귀를 열어놓고 전방을 주시하는 시간대이기 때문입니다. 보통 낮에는 북쪽 전방 10km까지, 밤에는 그 두 배에 달하는 20km까지 확성기 청취범위로 알려져 있습니다.


출처_이데일리


이와 별도로 비무장지대 내부 아군 초소 GP(Guard Post) 몇몇 군데엔 대면 작전병이 배치됩니다. 인민군 초소와의 거리가 수 백 미터 안팎으로 근접한 국군 GP는 확성기 대화를 하기엔 적격입니다. 155마일 휴전선에는 대면작전이 수행가능한 아군 초소가 수십 군데가 있습니다. 남과 북의 군인이 마이크를 잡고 대화를 하는 형식이지만 심리전의 원칙과 팽팽한 논리적 대결이 벌어집니다.


적의 단점은 최대화시키고 적의 장점은 최소화, 역으로 나의 장점은 최대화, 나의 단점은 최소화시키는 것이 심리전의 기본 수칙입니다. 특히 대면 심리전은 마이크를 들고 주의주장을 펼치는 ‘나와 적’ 2인뿐만 아니라 이 심리작전을 청취하는 복수의 피아(彼我) 군인을 고려하고 실시됩니다. 특히 인민군들에게 설득력을 발휘해야 합니다. 자유민주체제의 다양성과 시장경제의 역동성을 논리적으로 생생히 가시화시켜야 합니다.


M16 대신 마이크를 들고 싸우는 대면작전병


필자는 1987년~1989년 사이 강원도 고성 00사단 DMZ 내 국군 GP에서 군 복무하였습니다. 제가 맡은 임무가 바로 대북 확성기를 통해 심리전을 전개하는 대면 작전이었습니다. 국군 GP와 인민군 초소는 가까운 곳은 600~700m 거리입니다. 확성기 대화가 충분히 가능합니다. 바람이 없는 야간은 최적의 작전시간대입니다. 인민군은 대남심리전 전담조직으로 적공국 ‘적공조’ 조직을 운용합니다.


적공조는 김일성종합대, 김형직사범대, 김책공업대 등 유수한 북한 대학 출신자인데 신분은 군관급으로 알려졌습니다. 나이는 20대 후반부터 30대 초반으로 느껴집니다. 실제 작전에서는 그들은 20대 초반 일반 하전사로 둘러대고 있습니다. 남철 영철 성철 등 철자로 끝나는 이름으로 자신을 주로 소개합니다.


필자는 약 10여명의 적공조들을 상대로 대면작전을 수행했는데 논리적 언어구사가 정말 뛰어납니다. 보통 한 상대와 1개월 남짓 고정적으로 대화를 나누는데 인민군 골수 선전요원의 어휘력, 사상적 외피가 그대로 드러납니다. 그들은 미리 정해진 모범답안만 이야기하는데 상대방이 진저리칠 만큼 훈련된 태도를 보여줍니다. 북한 내부 이야기는 피하고 한국사회의 예민한 부분을 중점적으로 파고듭니다. 특히 김일성(당시 생존) 김정일 관련한 우리 측 공세에는 철저히 회피합니다.


출처_경인일보


강원도 고성 DMZ은 금강산 아랫자락이 뻗어내려 참으로 아름답습니다. 번지는 단풍을 계기로 삼천리 금수강산, 고향이야기를 나눌 때는 마치 오랜 친구처럼 정겹습니다. 북 상대방은 때론 통일이 되면 평양의과대학에 다니는 자신의 여동생을 소개시켜주고 싶다는 객쩍은 말도 합니다. 우리 측에서 세습체제의 비민주성을 언급하는 즉시 대화는 파투나고 맙니다.


소련이 해체되면서 고르바초프 당서기장이 앞장선 페레스트로이카(개혁) 글라스노스트(개방) 그리고 동구권의 민주화 바람을 언급하면 적공조는 주체사상과 위대한 수령의 영도력을 내세워 '우리식대로 잘살아간다’고 맞섭니다. 북쪽 인민군 초소 주변엔 선전간판이 많이 있습니다. <주체사상 만세> <군비축소> <반전반핵> <미군 나가라> <세금 없는 나라> <주체조선> <자유> <월북 환영> <단일민족> 등이 대표적입니다. ​


나는 국군초소의 김정운 병장이다


아래는 1988년 10월 26일 오전 11시 ~12시에 이뤄진 필자의 실제 대면작전 일부를 옛 메모를 통해 복원해 봅니다. (1988년 서울 올림픽은 사회주의권이 대거 참가하여 성공리에 개최되었음. 고르바초프 소련 공산당 서기장이 개혁 개방을 주창할 때이고 사회주의 동구권의 민주화 도미노의 씨앗이 싹트는 시점입니다.)


북 - 북한초소 적공조, 주체농업에 의한 생산량 확대 원고 낭독중.


남 - 인민군 민경초소에 새로운 친구가 마이크를 잡았구만. 나는 국군초소의 김정운 병장이다.


북 - 평소에 자네 이야기 많이 들었다. 나는 다른 초소에서 온 것이 아니라 근무서다가 마이크를 처음 잡게 됐다. 이름은 이현철 나이는 21세. 고향은 평양시 모란봉구역이다. 앞으로 정운이와 재미있는 이야기 많이 나눌 수 있기 바란다.


남 - 사나흘 동안 인민군 민경초소에서 아무도 마이크를 잡지 않아 소식이 궁금했는데 이렇게 새 친구를 만나게 되어 반갑네. 현철이는 내 동생뻘 정도 되는데 환영하는 의미에서 현철이가 평소에 궁금한 것들, 먼저 질문해봐라.


북 - 정운이는 마치 형님처럼 아량이 넓은 것 같다. 손아래 사람을 먼저 배려해주는 것은 우리 민족의 좋은 풍습이다. 그럼 한 가지 물어보겠는데 저번 올림픽 폐막식때 미국 선수단이 들쥐가면을 쓰고 입장을 했다는 데 정운이는 이 사실을 알고 있는가.


남 - 현철이 질문 의도를 대충 짐작할 만하다. 올림픽 폐막식은 개막식 분위기와는 다르게 헤어짐을 아쉬워하며 석별의 정을 나누는 자리다. 사상최대 참여국 기록을 세운 서울 올림픽이었다. 160개국 각국 선수단이 4년 후에 다시 만날 것을 약속하면서 각국 선수와 임원들이 입장순서 구별하지 않고 자유분방하게 어울렸다. 나도 TV화면으로 계속 지켜봤다. 유독 미국선수단이 들쥐가면을 쓰고 입장하는 것은 보지 못했다.


( 대면작전 요원은 평상시 신문과 방송 뉴스를 계속 열독, 시청해야함. 그 당시 3개 일간지가 GP로 배달되어 숙독하였고, TV 정규뉴스는 항상 챙겨보았음.)


출처_한겨레

북 - 분명히 미국 선수단이 들쥐가면을 쓰고 조선민족을 모독했다는 방송보도가 있었다. 이것은 몇 년 전 주한 미8군 사령관이었던 위컴 놈이 남조선 인민들을 들쥐와 같다고 망언을 한 적이 있는데 들쥐 가면사건도 이 같은 맥락에서 남조선인민들을 모독하는 사건이다. 나는 이 소식을 듣고 울분을 참지 못했다. 정운이 너의 생각은 어떤가.


남 - 외국인이 이유 없이 자기 민족을 모독한다면 우리민족이라면 누구라도 분노해야 마땅하다. 하지만 현철이가 북한 방송을 통해 들었다는 이른바 들쥐가면 사건이라는 것은 다른 측면에서 봐야한다. 까놓고 이야기해서 너희 북한 당국자 또는 대남사업 담당자들의 요즘 과업은 한국사회를 향해 반미 선동하는 것에 총력투쟁 하는 것 아니냐. 이 점은 현철이가 부인하지 못할 것이다.


그래서 한국 내에서 미국과 관련된 조그만 뉴스라도 발생하면 이것을 대단한 굴욕사건인 냥 과장보도하면서 반미투쟁할 것을 선전선동 하는 것 아니겠냐. 니가 이야기하는 들쥐가면사건이라는 것도 대남전략에 의해 북한 방송매체가 조작해서 2천만 북한주민들에게 허위선전하는 것으로 판단한다.


북 - 정운이가 내 이야기를 부정하고 있는데 한심하구나. 자기 땅에서 벌어진 일도 모르고 있으니... 그러면 며칠 전에 남조선 서울에서 미군 병사놈이 행패를 부려 남조선 인민들과 집단 편싸움을 벌인 사실을 알고 있느냐. 알고 있다면 너가 알고 있는 대로 이야기 해봐라.


( 이 사건은 전방에 근무하는 필자도 바로 며칠 전에 신문을 통해 알았는데, 북 적공조가 벌써 파악하고 있음을 알고 그들의 신속한 응용력을 실감. 동시에 철저히 지침과 상명하달 훈련에 의해 심리전을 수행하는 북 적공팀의 기계적 한계도 절감.)


남 - 그 사건은 잘 알고 있다. 지난 10월 16일 새벽 3시쯤 서울 이태원거리에서 술취한 미군병사 4명이 택시운전사와 싸움을 벌인 적이 있다. 이것에 대해 지나가던 한국 시민들이 미군병사에 대해 항의를 했다. 이 사건은 분명히 군인 신분으로 술을 먹고 민간인인 한국 시민에게 행패를 부린 미군 병사가 잘못을 했다. 경찰 관계기관에 의해 응분의 조치를 받을 것이다.


북 - 정운이가 알고 있다시피 한반도 남쪽을 강점하고 있는 미국놈들은 이렇게 남조선인민들을 깔보면서 지난 40년동안 계속 행패를 부려왔다. 정운이가 진정 조선 사람이라면 그같은 행위를 어떻게 용서할 수 있으며 울분을 참을 수 있냐. 미국 놈들은 지금 당장 자기 땅 미국으로 돌려보내야 한다.


남 - 미군병사 경범죄 사건은 우리의 경찰 당국이 현행법대로 처리할 문제이지, 너희들이 흥분과 열에 들떠 정치 군사적인 문제로 비화시켜 비분강개할 문제는 아니다. 판에 박힌 대남선전에 이용하려는 너희들 태도가 너무나도 상투적이고 지겹다. 나도 '대를 이어 충성하자’는 너희 북한 내부 세습체제 분위기를 언급하면 어떻겠냐? 그동안 북한 1인독재 권력체제 문제점를 꼬집으면 마이크를 잡은 북쪽친구들은 전부 대화를 거부했다.


북 - 자네가 구구절절이 잔소리를 늘어놓는데 긴말이 필요 없다. 미국 놈들은 오늘 당장 철수해야 한다. 통일을 진정으로 바라는 사람이라면 미군철수를 진정으로 바랄 것이다.


남 - 대한민국에 미군주둔은 6.25 남침전쟁을 근거로 해서, 전적으로 너희 북한 당국자의 반민족적 동족침략 행위로부터 주둔 이유가 발생했다. 너희들이 그렇게 떠들고 있는 주한미군철수 문제의 해결여부는 너희 북한 당국자에게 달렸다. 과도한 무장력을 해체시키고 진정으로 평화통일의 실천의지를 나타내는 것이다. 그렇게 한다면 주한미군 철수문제는 자연스럽게 해결될 수 있다.


북 - 참으로 결론이 나지 않는구먼. 우리 인민군에서는 전방 군인들을 현재 후방 건설사업에 투입시키고 있다. 평양 광복거리 건설장, 고속도로 건설장에 군인들을 동원하고 있다. 그러니 우리 인민군대가 무력증강을 하고 있다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이봐, 정운이. 우리가 아무리 이야기를 해도 결론이 나지 않겠구먼. 오늘은 길게 이야기했으니 그만하고 다음에 다시 해보자. (일방적으로 마이크 끔)


'밖의 소식'이 움직이게 한다


벌써 27년 전 일입니다. 지금 당장 DMZ 대면 심리전작전이 부활해도 아마 위 사례처럼 팽팽히 겉돌 수 있을 것입니다. 확성기가 다가가야할 핵심 대상은 바로 일반 인민군들입니다. 전선연변에서 초병으로 근무하는 하전사에게 다가가야 합니다. 북한 병사들을 변화시킬 수 있는 것은 ‘밖의 소식’입니다. 70억 인구 지구촌이 지금 어떤 가치와 어느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다는 외부 뉴스가 결국 김정은 체제를 뒤흔들 것입니다. ‘선군정치’ 3대에 걸친 세습독재정권은 한반도 실상이 제대로 담긴 정보가 북으로 흘러오는 것을 가장 무서워합니다. 정보 통제당하는 북한 주민이 남북 7천만 민족이 힘을 합쳐 이룩해야할 민족공동체가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지를 조금씩 깨달아 간다면 그 길이 바로 통일의 길이 됩니다.


확성기 방송은 김정은 정권에 대한 압력 수단이 아니라 인민군 더 나아가 북한주민에게 ‘세상 진실의 전파’라는 차원에서 접근해야합니다. 김정은 정권과의 거래 차원에서 중단하거나 재복구하는 대상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사실을 사실대로 알려주는 확성기는 항상 켜져 있어야 합니다. 맨 목소리로 만나는 대면작전은 작위적이고 인위적인 심리작전이라기보다 남과 북 무모한 대치를 어서 빨리 종식시킬 수 있는 진실의 채널로써 잠재력과 파급력이 큽니다.


움직이고 운동하는 것은 또 다른 운동성을 낳습니다. 진실의 심리전은 작동되어야 합니다. 분명 듣고 느끼는 귀가 있습니다. 귀와 입은 연결되어 있습니다. 꼭 말하고 싶은 귓속말을 낳고 세상이 가야할 길을 이어줍니다. 확성기를 켜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