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피동형 기자들’에 담긴 언론의 책임

2011. 8. 25. 09:04다독다독, 다시보기/미디어 리터러시




저는 한때 기자가 되고 싶었습니다. 꼭두새벽부터 출근해 기사 스크랩하고, 그것을 마치면 언론사에 보낼 보도자료며 기고문이며 이런저런 글을 쓰고, 저녁엔 짬짬이 기자들을 만나던 때였어요. 이럴 바엔 아예 기자를 해도 좋겠다 싶었죠. 

그러다 운 좋게 어떤 분과 반 년여 동안 같이 일을 하면서 내가 참 주제넘은 생각을 했다는 것을 단박에 알아차렸습니다. 오랫동안 기자를 하다 지금은 IT전문 온라인 신문사 편집국장을 맡고 있는 분인데요. 

제가 나름 심혈을 기울여 쓴 글, 아니 창피하지만 솔직히 말하자면 정확히 한 문장을 국장님께서는 무엇이 잘못됐는지 조목조목 짚으셨습니다. 그러면서 덧붙이는 한마디는 “그런데 사실 요즘 기자들도 당신보다 크게 낫지 않아”였습니다.


피동형 기자들


[피동형 기자들, 김지영 지음, 효형출판, 2011. 08. 08]


신문 • 방송은 국민에게 ‘매일의 국어 교과서다’ 

대중매체가 대중의 언어 습관을 선도하고 대중은 대중매체의 언어 표현을 무의식적으로 따라한다. (책 7쪽) 

‘미디어는 현실을 재구성한다’는 말은 현대 사회에서 언론의 역할이나 책임이 얼마나 막중한지 잘 나타낸다.
(책 207쪽)


‘아직까지는’ 언론이 대중에게 전문성을 인정받아 상당한 영향력을 미치는 원천입니다. 때문에 기자는 소위 말하는 ‘글빨’만 믿고 기사를 쓸 것이 아니라 대중의 언어 문화, 나아가 역사를 기록한다는 막중한 사명감을 갖고 기사를 써야 합니다. 저는 이와 같은 사람이 아니므로, 한때나마 기자가 되고 싶다던 생각이 참 주제넘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책 <피동형 기자들>은 특히 피동형과 익명 표현을 일삼는 신문을 낱낱이 파헤쳤습니다. 언론검열단을 통해 언론 통제와 조종이 일상화됐던 1980년 시절에 언론은 곡학아세(曲學阿世)격으로 생계형 또는 굴종형 • 권력 추구형으로 문장 스타일을 바꿨습니다. 

다시 말해, 계엄사령관 전두환 혹은 대통령 전두환 • 신군부 • 정부 등 정치권력의 행위를 정당화하거나 미화하기 위해 피동형과 익명 표현을 남발하게 됐다는 것입니다. 먹고 살기 위해, 즉 신문을 찍어 내기 위해 어쩔 수 없었다는 것이죠. 


‘아니면 말고’, ‘카더라’ 통신

‘카더라 통신’이란 정확한 근거나 사실 확인이 안된 소식을 사실처럼 전달하는 억측을 말합니다.
‘~라고 하더라’라는 경상도 사투리에서 나온 말입니다.


보도문장에서 피동형과 익명 표현이 문제인 이유는 그것이 객관보도를 해치는 주범이기 때문이라고 책은 주장합니다. 

주체가 명확하지 않은 피동형 문장이나 취재원을 밝히지 않는 익명 표현은 특정 사실을 정확, 공정하고 객관적으로 전달하기 어렵다는 것인데요. 

‘어슐러 르 귄’(Ursula Kroeber Le Guin, 미국 작가)도 “수동태는 간접적이고, 정중하고, 공격적이지 않고, 마치 아무도 직접적으로 그런 생각을 하지 않았다는 듯이 생각을 짜맞출 수 있고, 아무도 그런 행동을 하지 않았다는 듯이 행동을 짜맞출 수 있어서, 마침내 아무도 책임을 질 필요가 없어진다”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사실 피동형 익명 표현은 어렵지 않게 신문에서 찾아볼 수 있답니다. 특히 익명 보도에 대해 <신문윤리실천요강 제5조5항>은 “기자는 취재원의 안전이 위태롭거나 부당하게 불이익을 받을 위험이 있는 경우 그 신원을 밝혀서는 안 된다”고 규정하고 있습니다. 

꼭 이 경우가 아니더라도 기사를 작성하는 과정에서 취재원을 밝히지 못하는 경우는 얼마든지 있을 수 있습니다. 다만, 분명한 취재원도 없이 ‘관련 전문가’, ‘청와대 핵심참모’, ‘일반 대중’ 등을 들먹이면서 여론을 왜곡하거나 선동해선 안 된다는 것이죠. 

가령 ‘광우병 우려’를 보도한 MBC <PD수첩>에 대한 무죄 판결 관련 기사에서 보듯, 각각의 언론사는 저마다의 성향에 따라 ‘사실’을 의견으로 오염시키고 ‘의견’을 사실처럼 둔갑하는 기사를 쏟아냈습니다. 

진보와 보수 세력이 충돌할 때마다 쉽게 찾을 수 있는 사례라고 할 수 있죠. 물론 언론이 가치 지향적이라는 점에서 보면 당연한 현상이기는 합니다. 문제는 의견, 즉 주의 • 주장이 다르다고 해서 사실을 의견에 맞춰 왜곡하는 경우가 자주 발생한다는 점(책 65쪽)입니다. 


공공 언어 주도의 주체, 언론의 책임

책의 저자(김지영 한국신문윤리위원회 심의위원)가 전하듯, 언어는 규범 정신과 사용자 중심주의로 구분되어 생성과 소멸을 거듭하면서 끊임없이 변화하기 마련입니다. 

규범 정신이란 언어의 원칙을 지키자는 것이고, 사용자 중심주의란 사용자들이 많이 쓰는 말이라면 현재의 언어 원칙을 다소 어긋나더라도 존중해야 한다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자장면’이 맞는 표현이지만, 사람들이 ‘짜장면’을 더 많이 쓴다면 둘 다 맞는 표현으로 인정할 수 있고, 경쟁을 통해 어느 하나가 저절로 없어질 수 있다는 것이에요. 

하지만 그런 이유로 언론의 무주체 피동형 표현을 그러려니 하며 넘길 수는 없습니다. 보도문장은 정확성과 객관성, 공정성이 생명이기 때문이에요. 

최근에는 학교에서 NIE(Newspaper In Education)라 하여 신문을 활용한 교육이 이뤄지고 있으며, 일부 언론사는 NIE 지도자 양성 과정을 열기도 합니다. 

습관적으로 신문을 읽는 저로서는 매우 효과적인 교육방법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신문을 교육자료로 올바르게 활용하기 위해 무엇보다 중요한 것이 바로 제대로 된 기사를 찾는 것입니다. 

특정 주장에 대해 학생들이 “그런데 이게 누구의 주장인가요”라고 물었을 때 대답할 수 있는 기사, 어떤 사안에 대한 평가가 대다수의 ‘여론과 일치하여 평가되는 것’인지, 아니면 ‘특정인의 의견으로 평가되는 것’인지 구분할 수 있는 입장이 명백한 기사는 다양한 의견을 수렴하고, 좋은 기사를 찾도록 도와주기 때문에 NIE에서 필요하지 않을까요?

책 <피동형 기자들>을 통해 우리는 진실을 추구하는 언론의 책임과, 독자들이 좋은 기사를 찾아 받아들여야 하는 책임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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