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은 4·19 혁명을 어떻게 다뤘을까?

2012. 4. 19. 16:29다독다독, 다시보기/이슈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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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9 혁명을 아시나요?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누구나 한번쯤은 들어봤을 법한 이 혁명을 알아보려면 50여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게 됩니다. 1960년 4월 19일에 일어났던 혁명이기 때문인데요. 4・19 혁명은 당시 부정부패를 자행하면서까지 장기 집권을 하던 정권에 대한 반발로 학생과 시민이 중심 세력이 되어 일으킨 ‘반독재 민주주의 운동’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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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 대통령의 장기집권 욕심으로 가결된 개헌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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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대통령이었던 이승만은 국민들의 신뢰와 지지를 한 몸에 받았었는데요. 이러한 국민들의 지지가 오히려 화를 불렀던 것인지 이 대통령은 점점 장기집권 욕심을 부리게 됩니다. 1954년 11월 이승만은 종신집권을 위해 헌법에 있는 ‘중임을 제한하는’ 조항을 없애는 개헌안을 통과시키기 위해, 찬성표 수에 국회의원수를 끼워 맞추는 기상천외한 방법을 동원시켜 이 개헌안을 가결되게 만들었습니다. 또한 이러한 부정선거 과정을 고발하는 언론들을 탄압하는 것은 물론, 야당계 언론에 대한 압력을 강화해 당시 정부를 비판하던 경향신문을 폐간시키기도 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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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정권에 대한 국민적 불만이 쌓여있던 가운데, 4・19 혁명의 도화선이 된 가장 직접적인 원인은 5월에 예정돼있던 선거 날짜까지 두 달 앞으로 앞당기면서 다시 한 번 집권을 하려는 치밀한 부정선거 계획이 드러나게 된 것이었습니다. 사전에 미리 투표를 해놓고, 투표함을 바꿔치기 한다거나 득표수를 조작해 발표하는 것들이었죠. 그러나 한 경찰관이 이런 선거에 대한 정부의 지령을 국민에게 폭로했고, 선거 2일 뒤인 3월 17일 이승만 정권이 80%의 높은 득표율로 당선됐음을 알렸으나 이미 그 부정한 과정을 알고 있는 국민들은 아무도 이 결과를 믿으려 하지 않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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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이승만 대통령의 부정선거에 대해 항의하는 시위가 전국적으로 일어났습니다. 1960년 4월 19일, 전국의 시민과 학생들이 함께 모여 ‘이승만 하야와 독재정권 타도’를 외치며 각 대학에서 선언문을 낭독하고 당시 행정부가 있던 곳으로 행진하는데, 당황한 정부가 계엄령을 선포하고 탱크를 앞세워 이 시위대를 막으면서 엄청난 부상자와 사망자가 속출하게 됩니다. 믿을 수 없는 참상 앞에 분노한 국민들은 시위를 계속했고 결국 이는 이승만 대통령의 공식적인 사과와 함께 대통령의 자리에서 물러나는 결과를 가져오게 되었습니다.

 

 

 

 

 

 

여기서 잠깐, 당시 언론들은 이 4・19 혁명을 어떻게 다뤘을까요? 동아일보는 혁명을 다음과 같이 소개하고 있습니다.

 

 

당시 언론들은 4·19 혁명을 어떻게 다뤘을까?

 

 

<마산 3.15 의거 김주열 열사 시신 발견>


부산지방 검찰청에서는 13일 하오 4시 30분부터 11일 마산시에서 시체로 발견된 김주열 군의 검안에 착수하여 이날 하오 7시에 끝마쳤다. (중략) 김군의 눈에 박힌 그 최루탄의 형태를 보면 인위적으로 박은 것 같은 흔적이 있어 그에 대한 검찰 해명이 지극히 어려운 문제로 등장하고 있는가 하면 죽은 시체가 바다 속에 제 발로 걸어 갈 수 없는데도 불구하고 바다 속에서 시체로 발견되었다는 문제는 어쨌든 확실히 밝혀져야 할 문제이어서 검찰은 이 시체의 의문을 풀어주기 위하여 상당한 고민에 빠질 것 같다. [1960. 04. 11]  

  

 

<부산·청주서 대규모 데모>


고려 대학교 학생 삼천여 명은 18일 하오 1시경부터 안암동에 있는 동 대학교의 교문으로부터 물밀듯이 밀려나와 "자유 정의 진리 드높이자" "민주 역적 몰아내라"는 구호를 외치면서 대대적인 '데모'를 감행하였다. 머리에는 흰 수건을 둘러매고 각종 '플래카드'를 들고 교문을 나선 학생들은 안암동 입구 신설동 로터리 동대문 종로4가 화신 앞 광화문 네거리를 거쳐 국회 앞을 지나기까지… (후략) [1960. 04. 18] 

 

 

<전 수도의 거리 뒤흔든 학생들의 노도>


18일의 고대학생 데모에 뒤이어 19일에는 국립 서울대학교의 전 학생들과 성균관·동국·경기·중앙·연세·홍익 대학생 등, 약 십만 명이 대대적인 데모를 감행하여 수도 서울을 완전히 데모 분위기 속으로 휘몰아 넣었다. (…중략…) 경관은 본격적으로 실탄과 최루탄을 발사하여 일부 학생들이 현장에 쓰러지기 시작 이날 하오 5시경 경무대 어구부터 경찰은 데모대를 해산시키기 위하여 본격적으로 총격을 개시. 수십 명의 사망자와 헤아릴 수 없을 정도의 부상자를 내었다. [1960. 04. 19]

 

 

이후에도 매년 4월 19일이 돌아오면, 이 4・19 혁명을 돌아보고 그 의미를 되짚는 기사들이 대부분의 언론에서 나타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는 아마 4 ·19혁명이 애초에 어떤 정치적 목적을 가지지 않은 순수 민중의 힘으로 정권을 교체한 첫 번째 사건이었기 때문일 겁니다. 지금까지도 4 ·19혁명은 한국의 정치발전사에 역사적으로 큰 의미를 지닌 사건으로 평가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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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열, 그 이름 빛나도 묘비는 뒹굴어>


김주열군 간지 네 돌, 영원히 기념한다더니 기금 맡은 전 의원 간곳없고…그래서 당시 김군의 무덤에 초라하게 나무로 된 비가 서 있으니 이것을 돌비석으로 바꾸어 주었으면 좋겠다고 김씨가 말하자 장 총리는 그 자리에서 승낙했다 한다. 위령제를 마치고 경회루에서 유족회 위안회가 열렸는데 이 자리에서 장 총리는 모 비서를 통해 김씨에게 돌비석을 만들 비용 80만 환 (구화) 을 남원 출신 모 민의원에게 전달했다고 말했다.
기사원문: 1964. 3. 14 [경향신문]

 

 

<4.19 묘역이 비좁다>


4.19 묘소가 포화상태다. 의거일로부터 25년이 지난 현재 당시 부상자 중 사망자가 늘고 있으나 기존의 묘역에는 이미 묻힐  장소가 없고 묘소 관리에 관한 법적 근거도 마련돼 있지 않아 확충 계획을 세우지도 못하고 있다. 4.19 묘지는 5.16 군사정변 이후 재건 국민운동 중앙본부가 부정 축재자의 재산인 서울 도봉구 수유동 산 9의 1 일대를 환수, 1만 2백 43평의 묘역을 가꾸어 1백 85기의 희생자들을 안장했었다. 그 후 25년 동안 23기가 더 늘어나 모두 2백8기가 되었는데 사망자가 더 늘어날 경우 현재의 묘역으로서는 수용이 어려운 형편이다. 기사원문: 1985. 4. 19 [경향신문] 

 

 

오늘은 4·19 혁명이 일어난지 52년째 되는 날


어떠세요? 매번 듣기는 했어도 자세히는 알지 못했던 4・19 혁명과 당시 상황, 다독다독 포스팅을 통해 잘 정리되셨나요? 2012년 4월 19일 오늘은 4・19 혁명이 일어난지 52년이 되는 날입니다. 민주화 운동에서 유명을 달리한 수많은 학생들과 시민들이 있었기에 지금의 민주화 사회에 우리가 살고 있음을 잊어서는 안 되겠죠. 오늘 신문에서는 4・19와 관련해 어떤 기사가 나왔는지를 확인해 보셔도 좋을 것 같습니다. 4・19 혁명에 관해 더 많은 자료가 필요하거나 관심이 생기셨다면, 다음 목록에서 확인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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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9 혁명 기념 도서관 http://library.419revolution.org/
민주화 운동 기념 사업회 http://www.kdemo.or.kr/site/
네이버 캐스트 한국현대사 http://navercast.naver.com/dna/history/2449
419 혁명 홈페이지 http://www.419revolution.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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