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각으로 느끼는 종이책의 예술적 가치, 슈타이들 전

2013. 7. 10. 14:09다독다독, 다시보기/현장소식





흔히 육체적 관계를 배제하고 정신적 교류만 하는 사랑을 일컬어 ‘플라토닉 러브’라고 하지요. 이에 대해 여러분들은 어떻게 생각하세요? 물론 드물게 가능한 경우도 있겠지만 일반적으로 스킨십이 없는 연인과의 관계는 잘 상상이 가지 않을 겁니다. 이는 우리가 ‘책’을 대할 때에도 마찬가지입니다. 눈으로만 보는 것이라는 고정관념을 버리고 오감을 활용해 책의 촉감이나 냄새를 제대로 느끼려고 할 때, 책을 사랑하는 마음도 더 커질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에게 책을 받아들이는 감각영역을 ‘시각’에서 ‘촉각’과 ‘후각’으로 넓게 확장시켜주는 공간이 있습니다. 바로 세계적인 아트북의 명장 ‘게르하르트 슈타이들’의 전시회입니다. 아시아 최초로 4월 11일부터 10월 6일까지 서울 대림미술관에서 열리고 있는 이번 전시회에서 우리는 작가의 책을 직접 만지고 냄새까지 맡아가며 종이책의 가치를 되새겨 볼 수 있습니다.





전시장의 2층에서 4층까지 각기 다른 테마로 슈타이들이 칼 라커펠트, 짐 다인, 로버트 프랭크 등의 아티스트들과 협업한 작품들이 다양하게 전시 되어있습니다. 흥미로운 점은 완성된 아트북과 더불어 책의 출판 과정도 고스란히 엿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를 통해 슈타이들은 우리에게 한 권의 책이 어떻게 예술의 경지에 이르게 되는지를 알려줍니다.  


정보의 홍수 속에서 소비되는 텍스트의 일회성에 안타까움을 느끼는 이들에게 의미가 있을 <슈타이들 展(전)>을 이제부터 시각, 후각, 촉각에 따라 입체적으로 감상해보겠습니다.




읽기 편한 책의 비밀 ‘타이포그래피’


전시장 3층 한쪽엔 다양한 서체의 글자들로 빽빽이 들어차 있는 공간이 있습니다. 책의 가장 기본이 되는 ‘글자’와 관련된 공간인데요. ‘타이포그래피’란 간단히 말해 글꼴과 조판을 통한 글자의 배열을 의미합니다. 슈타이들의 책들은 각각의 특성에 맞는 타이포그래피를 갖고 있다고 합니다.


이 공간에서 관람객들의 시선을 끄는 것은 샤넬과 슈타이들이 함께 완성한 유명 패션 브랜드인 샤넬 서체였습니다. 이런 상업적 서체 디자인 외에도 16세기에 만들어진 매우 고전적으로 보이는 옛 서체부터, 영국 신문인 ‘더 타임’에서 쓰이는 “Times New Roman"체 까지 다양한 타이포그래피를 한눈에 비교하고 살펴볼 수 있습니다.





수많은 서체들을 더욱 재미있게 관람하는 팁! 좋아하는 알파벳을 하나 정하고 각각 서체들로 쓰인 글자들을 비교하면서 나에게 편한, 나만의 서체를 찾으며 관람하시면 타이포그래피 관을 더 유익하게 둘러보실 수 있습니다.




‘책도 하나의 예술작품이다’, 허공에 매달린 52권의 비밀


전시관 4층에서 책이 천장에 대롱대롱 매달린 책들을 보실 수 있습니다. 각기 다른 길이의 줄에 연결된 책들은 마치 아기침대 위의 모빌 같기도 합니다. 그 책들의 그림자 또한 매우 멋있는데요. 이 책들은 미국의 팝 아티스트인 짐 다인(Jim Dine)과 슈타이들이 함께 출판한 책들로 만들어진 작품입니다. 1년 동안 일주일에 한 권씩 책을 만든다는 아이디어에서 출발해 각기 다른 내용들로 이루어진 52권의 책을 만들어 사용했다고 합니다.





52권의 책 중 슈타이들이 가장 좋아하는 책의 번호는 40번이라고 하는데요. 그 이유는 직접 전시장에서 책을 펼쳐보면 짐작해볼 수 있습니다. “Hot Dream"이라는 책 시리즈의 제목처럼 허공에 매달린 수많은 책 속에서 자신만의 뜨거운 꿈을 찾아보시길 바랍니다.




향수 ‘Paper Passion’ : 후각과 소비욕구를 동시에 자극하는 ‘출판의 향기’

 

“여러분, 만지지만 마시고 코에 가까이 대고 냄새도 맡아보세요. 종이마다 다른 고유의 냄새가 있어요.” 슈타이들이 사용했던 종이를 관람객들이 직접 만져보도록 종류별로 진열해놓은 전시 코너에서 안내자가 말했습니다. 그 이야기를 따라 코를 대고 눈을 감은 채 냄새를 맡자, 정말로 종이마다 희미하게 다른 향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후각을 담당하는 뇌 부위는 감정과 기억을 담당하는 곳과 일치한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한 사람이 어떤 책을 나중에 떠올릴 때 그 종이의 냄새는 매우 중요한 요소가 될 것입니다. 슈타이들은 그 점을 알고, 책을 만들 때 알맞은 향기를 지닌 종이를 고르는 것도 소홀히 하지 않았던 명장이었습니다.





샤넬의 수석디자이너 칼 라커펠트는 이런 장인정신을 가진 슈타이들을 떠올리며 갓 인쇄된 책의 향을 담은 향수 ‘Paper Passion’을 제작했습니다. 전시장 2층에서 무료로 시향 가능한 이 향수는 뿌리는 순간, 세상 어디에도 없는 ‘출판의 향기’가 물씬 느껴집니다. 그 냄새 때문에 당장이라도 따끈따끈하게 인쇄된 종이책이 눈앞에 쏟아질 것 같은 기분이 들기도 하는데요. 이 향수의 정체성과 어울리는 클래식한 책 모양의 패키지는 향과 함께 소비욕구를 더욱 자극합니다. 제품은 12만원에 1층 로비에서 판매되고 있으니, 다들 지갑 조심하세요. 




손끝으로 느껴보는 종이, 천차만별 그 촉감


‘비오는 날 책장 끝에서 느껴지는 습기, 오래된 책에서 나는 냄새, 햇빛 가득한 날 책장이 내뿜는 색채, 책장 하나하나를 넘길 때마다 각기 다르게 다가올 느낌과 촉감들. 그 모든 것들이 같은 경험일까요?’ 슈타이들은 이것이 종이가 갖는 매력이라고 말합니다.


<슈타이들 展>에는 출판 과정을 시각적으로 보여줄 뿐만 아니라, 이렇게 종이를 직접 만져 촉각으로도 느낄 수 있게 한 전시실이 마련되어 있는데요. 열을 맞추어 종이가 나란히 걸려 있는 이 전시실은, 마치 원단을 걸어놓은 패션 디자이너의 작업실을 연상시키기도 합니다.





실크같이 마냥 부드러운 질감의 종이와 쓱쓱 문지르면 살갗이 일어날 것만 같은 거친 표면의 종이. 같은 크기여도 깃털같이 가벼운 종이부터 묵직함이 느껴지는 무거운 종이까지. 이처럼 재질에 따라 종이의 쓰임도 가지각색이었는데요. 빛의 각도에 의해 질감과 색이 달리 보이는 그 마술을 손끝으로 만져볼 수도 있으니, 생생함 그 자체입니다. 손끝에 감겨드는 색다른 종이의 결, 느껴보고 싶지 않으신지요!




두 거장의 만남, 슈타이들-칼 라거펠트 콜라보레이션


<슈타이들 展>에서는 슈타이들이 세기를 빛낸 아티스트와 펼친 협업의 결과물도 볼 수 있는데요. 전시회에서 꽤나 큰 규모를 점하고 있는, 샤넬의 패션디자이너인 칼 라거펠트와의 콜라보레이션이 바로 그것입니다. 





이 둘의 숨겨진 일화가 흥미로웠습니다. 칼 라거펠트는 3장의 사진을 주고 이걸로 샤넬의 패션 카탈로그를 만들어달라고 요청했습니다. 슈타이들은 이 사진들을 스캔한 후 초안을 만들어 테스트 프린팅을 했습니다. 결과물은 아름다웠지만 슈타이들은 패션산업 분야에 경험이 없었기 때문에 자신의 아이디어가 그들의 세일즈에 도움이 되는지 확신할 수 없었다고 합니다. 그런 슈타이들의 걱정을 들은 칼 라거펠트는 ‘우리는 패션을 파는 게 아니라 분위기를 파는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이 말은 슈타이들이 더 좋은 카달로그를 만들 수 있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슈타이들은 책을 만들 때 오직 독자, 책을 보는 사람들을 환상과 정보의 세계로 이끄는 것에 심혈을 기울인다고 합니다.


슈타이들의 이런 프로페셔널한 마음과 칼 라거펠트의 화려한 샤넬이 만난 결과물, 그 특유의 분위기가 궁금하지 않으신가요? 




“이런 책을 없을 거야” 에드 루쉐(Ed Ruscha)와 함께한 독보적인 소설책





슈타이들이 작업한 책 중에 가장 많은 노력이 들어간 이 작품(Jack Kerouac-ON THE ROAD). 소설책에서 그 상황과 배경이 느껴질 수 있도록 최대한의 감각을 동원시키기 위해 손수 작업하여 만들었다고 하는데요. 어울릴만한 종이 재질과 엠보싱처리로 상황에 맞는 올록볼록한 모양까지. 300개의 한정판으로 제작된 이 책은 가격이 무려 1,000만원이라네요! 가장 비싸게 사 본 책의 가격이 5만원이었는데…. 이 책 앞에선 숙연해지네요. 





슈타이들전 관람 TIP!


- 대림미술관 인터넷 홈페이지에서 무료로 온라인 회원을 가입하면 40% 할인

- 스마트폰에 대림미술관 앱을 다운받아 가시면 온라인 가이드와 함께 더욱 유익한 관람

- 오전 11시부터 오후 5시까지 매 정각마다 ‘도슨트’의 설명과 함께 전시를 관람

- 오전 11시 (화, 수, 금, 토, 일), 오후 2시(화-금), 오후 4시(화-금, 일) 엔 미술관 옆 D Lounge에서 “How to Make a Book with Steidl" 이라는 제목의 슈타이들과 관련된 영화상영



슈타이들은 출판 작업을 할 때에 꼭 흰색 가운을 입는다고 합니다. 작업을 할 때는 컴퓨터도 사용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일이 끝나기 전까지는 아무도 출입하지 못하기 때문에 출판사에서 요리사를 따로 고용한다고 하네요. 이 밖에도 슈타이들 출판사의 특별한 규율, 그리고 그가 말하는 ‘아날로그’가 궁금하지 않으신가요? 책의 소중함을 함께 하고 싶은 분, 책을 좋아하고 싶은 분과 함께 가시면 더 재미있는 전시회가 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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