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독다독, 다시보기/생활백과(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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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물든 단풍은 봄꽃보다 아름다워
뜨거운 밥 앞에 무릎을 꿇고 가까운 이웃들과 함께 논을 빌려 벼농사를 지었어요. 초봄 못자리를 시작으로 5월엔 모내기, 6월엔 김매기 일꾼 우렁이를 넣고, 7월 땡볕 아래서 손으로 일일이 김을 맸지요. 모내기, 김매기, 벼 베기 하는 날엔 아이들도 함께해요. 아이들은 제 깜냥껏 어른들 일을 도우며 밥 한 그릇이 제 입에 들어오기까지의 과정을 자연스럽게 배우지요. 해마다 느끼는 거지만, 익은 벼의 황금빛은 정말 고와요. 에서 파란 옷의 나우시카가 걷던 황금빛 벌판처럼 눈부시지요. 일찌감치 논물을 빼낸지라 추수할 땐 논바닥이 적당히 말라 있었어요. 그 많던 우렁이들도 논에 물 뺄 때 다 쓸려갔는지 보이지 않았습니다. 커다란 콤바인이 논에 들어서자마자 순식간에 벼를 베면서 지나갑니다. 낟알들을 바로 훑어서 기..
2015.11.12 -
불을 지피며 숲을 생각하다
든든한 땔감, 고마운 온기 가을비 내린 후부터 기온이 뚝 떨어졌어요. 바야흐로 화목보일러에 불 지피는 계절이 돌아왔습니다. 막바지 가을걷이로 고단한 몸에 뜨끈한 방바닥은 크나큰 위로지요. 우리집 땔감은 간벌한 숲에서 가져온 잣나무, 참나무, 아까시나무들이에요. 숲의 안쪽엔 간벌만 해놓고 치워내지 못한 나무들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습니다. 버려진 채로 눈비에 썩어가는 나무들을 보면 무척 아까워요. 하지만 그걸 가져다가 연료로 쓸 사람은 이 동네에 많지 않습니다. 동네 어르신들은 대부분 전기보일러나 기름보일러를 쓰시거든요. 나무하는 일은 너무나 힘들고 강도 높은 노동이라 연세 드신 어른들로선 엄두를 내기 어려워요. 하지만 우리는 아직 젊으니 돈으로 비싼 기름을 사는 대신 땔감 노동으로 겨울의 온기를 얻고 있지..
2015.10.28 -
잘 부패해야 건강한 식품
햇살이 베풀어준 소박한 저장법 하늘은 높고 햇살 눈부신 날, 붉은 고추를 갈대발에 펼쳐 널어요. 무릎 꿇고 엎드려서 고추를 낱낱이 펼치고 있자니 어깨와 잔등에 뜨거운 가을 햇살이 쏟아집니다. 이즈음 건조한 공기와 뜨거운 태양의 열기는 그냥 보내기엔 너무 아까워요. 고추만 말리는 게 아니라, 땀에 젖은 옷들과 눅눅한 여름 이불도 산뜻하게 빨아 널고, 겨울 솜이불과 솜베개도 꺼내 햇살에 소독합니다. 이 강렬한 볕은 설익은 곡식을 여물게 하고 모든 축축하고 습한 것들을 바스락바스락 가볍게 말려 버리지요. 텃밭의 가지가 쉬지 않고 달립니다. 며칠만 안 들여다보면 덤불 속 애호박도 주렁주렁 맺혀요. 한꺼번에 다 먹을 재간이 없으니 부지런히 썰어서 말립니다. 아주까리도 무성하게 자랐어요. 어렸을 때 엄마는 집 마당..
2015.10.15 -
한 알의 씨앗은 ‘오래된 미래’
텃밭의 고추에 심한 탄저병이 들어 결국 고춧대를 다 뽑고 말았습니다. 탄저병은 고추가 타들어가는 병이에요. 한번 번지기 시작하면 속수무책일 만큼 치명적이라 일반 관행농법에서는 정기적으로 농약을 살포해 병을 방지하지요. 우리야 농약을 쓰지 않으니, 이랑과 포기의 간격을 넓혀 심고 탄저병이 생긴 포기를 일찌감치 뽑아내는 식으로 방어해왔는데요. 이 병 때문에 고추밭 전체를 포기한 건 올해가 처음입니다. 이렇게 된 이유가 짐작되지 않는 건 아니에요. 고추가 연작(이어짓기)을 싫어한다는 걸 알면서도 텃밭의 규모가 크지 않다보니 지난해 고추 심었던 자리에 또 고추를 심고 말았거든요. 또 하나 미심쩍은 건 종자예요. 8년째 이어오던 토종 종자를 올해는 이런저런 사정으로 발아시키지 못해 종묘상에서 산 개량종 고추 모종..
2015.10.01 -
달걀을 세울 수 없다고요?
‘콜럼버스의 달걀’도 고정관념 아이 간식으로 달걀을 삶아 에그샌드위치를 만들었어요. 샌드위치를 맛있게 먹은 아이가 남은 달걀 하나를 식탁 유리판 위에 조심조심 세울 때만 해도, 귀여운 장난이라는 생각만 했지 달걀이 서리라곤 상상도 하지 않았지요. 그런데 순간 깜짝 놀랄 일이 벌어졌습니다."엄마! 달걀이 섰어!""와..."믿어지지 않았어요. 달걀은 세울 수 없다고 다들 말하잖아요. 삶은 달걀이라서 선 걸까? 날달걀은 안 되지 않을까? 긴가민가 싶어서 다음날, 둥우리에서 갓 꺼내온 달걀을 조심조심 세워봤습니다. 와! 달걀이 섰어요! 어떻게 이런 일이? 비밀은 달걀 아랫면에 있어요. 우리집 달걀 중에는 이렇게 우둘투둘한 표면을 가진 게 종종 있거든요. 이번엔 다른 달걀을 세워봤습니다. 역시 쉽게 섰어요. 표면..
2015.09.14 -
세상에 나쁜 벌레는 없지요
삶과 죽음의 자연스러운 순환 "어머! 이 집엔 메뚜기가 많네요." 대문으로 들어서던 손님이 깜짝 놀랍니다. 한 걸음만 내딛어도 발아래서 톡톡!! 메뚜기들이 튀어 오르거든요. 종류도 갖가지예요. 벼메뚜기, 팥중이, 섬서구메뚜기, 방아깨비, 베짱이, 풀무치... 온동네 메뚜기 무리가 다 우리 뜰로 모이는 모양이에요. 메뚜기가 많으니 참개구리들도 늘었어요. 여기서 펄쩍 저기서 펄쩍, 메뚜기 못잖게 바삐 뛰어다닙니다. 땅을 갈지 않고 제초제 살충제도 쓰지 않는 우리 밭 흙은 지렁이와 온갖 벌레들의 서식처예요. 땅 위 무성한 풀숲은 각종 곤충들의 번식처고요. 농약을 안 쓰니 벌레를 한 마리 한 마리 손으로 잡아야 해요. 곤충들은 우리 밭의 작물을 갉으며 알을 낳아 종을 잇고, 나는 그 개체의 목숨을 거두며 삶과 ..
2015.08.27